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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yrus/Digging in the Dirt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Episode 16 - 20

Episode 16. 실로 알 수 없는 IBM의 패배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진 The PC는 애플 II와는 다른 관점으로 엔드 유저에게 다가갔다. 일단 겉보기부터 The PC는 애플 II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직육면체의 매우 보수적인 사무용 스타일을 고집했고, 모니터를 옵션이 아닌 표준 사양으로 넣었으며, 키보드가 본체에서 분리되어 사무 환경에 보다 적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The PC가 기존의 애플 II보다 강력한 컴퓨터라고 보기는 힘들다(IBM PC와 애플 II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비지칼크 스프레드시트는 모습과 기능 면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애플 II는 The PC에 포함되어 있는 않은 많은 기능들을 기본 사양으로 제공한 완전한 패키지 PC였다. The PC는 애플 II와 같이 3000 달러에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와 사운드 카드가 내장되어 있지 않았고 프린터와 모뎀을 연결시킬 시리얼이나 패러럴 포트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엔드 유저가 The PC를 구입하여 컴퓨터의 기본 기능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2~3000 달러의 추가 비용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PC는 애플 II를 눌렀다. 80년대 초반 PC의 주 고객층은 일반 엔드 유저가 아니라 정부 기관과 기업들이었고, 이들은 사무자동화라는 매혹적인 메타포 앞에 기꺼이 2000 달러의 추가 비용을 지불했던 것이다. 불과 1, 2년 전 만해도 수십만 달러를 지불해야만 일반 업무에 적용시킬 수 있던 미니 컴퓨터의 성능을 단 몇 천 달러에 책상 위에서 맛 볼 수 있다는 The PC의 매력은 애플 II 컴퓨터를 초, 중, 고등학생의 다목적 게임기기로 전락시키고 만다. 여기서, 스티브 잡스는 "PC는 실질적인 성능보다 어필할 수 있는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다."라는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되며, 워즈니악의 '정신의 자식'과도 같았던 애플 II의 산소호흡기를 80년대 중반 자신의 손으로 떼내고 만다. 이것으로 애플 II와 IBM PC의 대결은 끝이 났다.

그러나 IBM사 또한 이 대결의 진정한 승자는 아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는 말이 있듯, 진짜 재미를 본 것은 MS-DOS, 로터스 1-2-3, 그리고 워드 퍼펙트와 같은 애플리케이션들 제공 업체들과 X86 프로세서의 인텔 등이었다.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실리콘 밸리의 진정한 예언가였다.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던 '볼륨이 전부다!'라는 프로세서 철학은 이제 PC 산업의 '만류의 법칙'이 되었으며, 인텔사는 18개월을 주기로 어김없이 X86 프로세서를 밸리에 쏟아냈다. IBM사의 The PC를 통해 밥 노이스는 그토록 원하던 '볼륨'을 얻었고, 이제 인텔사는 더 이상 반도체 회사가 아닌 실리콘 밸리의 태양으로 떠올랐다.


Episode 17. 칼잡이 애플과 총잡이 IBM

1980년대 초, IBM사의 'The PC'는 기존 PC 시장의 모든 것을 획일화시켰다. 즉 The PC는 고만고만한 동네 야구팀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리그에 프로 리그의 출현을 의미했으며, 이로 인해 알테어, 임사이, 코모도어, 탠디, 라디오 샥 등에서 제작된 독특한 모양과 기능의 퍼스널 컴퓨터들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물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회색 케이스에 MS-DOS가 내장된 똑같은 모양의 PC 클론(호환기종)들이다. 애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PC 클론의 출현으로 애플 II의 PC 시장 점유율은 급속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IBM PC 클론의 독주에 쇄기를 박은 불후의 명작, '로터스 1-2-3'이 출현한 1983년을 기점으로 애플사의 모든 PC들은 사무용 PC로서의 존재 위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모든 상품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려면, 그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시켜주는 보조 제품이 있어야 한다. 가령, 닌텐도의 게임기에는 '마리오 브라더스'가 있었고, IBM PC 클론에게는 로터스 1-2-3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로터스 1-2-3은 기존의 표준 스프레드시트였던 '비지칼크(VisiCalc)'와는 달리 256K라는 가공할만한 메모리 사양을 요구했고,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퍼스널 컴퓨터는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 사용자들로 하여금 IBM PC를 사지 않으면 안되게 한 이유, 바로 로터스 1-2-3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사무용 애플리케이션의 바이블로 통하던 로터스 1-2-3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보다 더 큰 장벽은 모든 애플리케이션을 총체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운영체제의 부재였다. 잡스에게 있어 로터스 1-2-3은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면 풀 수 있는 일시적인 난제에 불과했지만 운영체제는 결코 몇 명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만만한 숙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애플 II는 시작부터 운영체제를 염두에 부고 제작된 컴퓨터가 아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애플 컴퓨터의 하드웨어 구조에 모든 열쇠를 쥐고 있던 워즈니악의 중도하차로 인해 애플 II는 MS-DOS라는 복병 앞에서 영원히 무릎을 꿇고 만다.

실력을 떠나서 칼잡이는 총잡이를 이길 수 없다. 그러한 도전이 얼마나 무모한가는 이미 앞서 시도했던 수많은 군소 컴퓨터 회사들이 몸소 보여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애플 II에게 몇 년의 생명을 더 연장하는 자질구레한 처방 따위는 단호히 거부했다(물론 존 스컬리와 마이크 마큘라는 마지막까지 애플 II를 포기하지 않고 산소 마스크로 애플 II의 수명을 연장해가면서 애플사를 매킨토시와 애플 II라는 양대 구조로 분열시켰지만 결국 두 마라의 토끼를 모두 놓치게 된다). IBM사의 PC는 애초부터 애플 II를 죽이기 위해 탄생된 컴퓨터였으며, 스티브 잡스는 이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잡스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한 수 아래의 컴퓨터에게 패배했다는 불쾌감이었다. 퍼스널 컴퓨터의 대중화를 선도한 천하의 애플컴퓨터사가 하등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렇고 그런 IBM PC에게 역전패를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몹시 괴로웠다.

스티브 잡스는 이 시점에서 애플사의 미래는 물론이고,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180도 전화시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텔 프로세서와 MS-DOS로 획일화된 PC 시장에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새로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아키텍처 구조로 제작된 퍼스널 컴퓨터를 구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IBM PC 클론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극비리에 추진한 잡스의 새로운 도전, 코드명 리사(LISA)! 그것은 하드웨어, 운영체제 그리고 애플리케이션 작업을 모두 하나의 프로젝트로 봉합하는 것이었다.


Episode 18. 1984년은 결코 1984년이 아니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돌연변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돌연변이는 멸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명체를 의미하지만, 더 이상 전자의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 즉, 돌연변이는 멸종해가는 종(種)의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생명체로서 0.0001 퍼센트의 생존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매우 기적적인 생명체이다." 스티브 잡스의 매킨토시는 IBM사의 핵폭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퍼스널 컴퓨터이며, 애플 II라는 전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달리한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말 그대로 돌연변이 상품인 셈이다. 1984년 슈퍼볼 광고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된 "1984년은 결코 1984년이 아닐 것이다"라는 애플사의 매킨토시 광고 슬로건은 조지 오웰의 <1984년> 메타포를 빌려 수많은 PC 사용자들에게 뼈 있는 유머를 던짐과 동시에 애플컴퓨터가 돌아왔음을 실리콘 밸리에 널리 알리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통해 선보인 GUI(Graphic User Interface) 개념은 밥 노이스의 집적회로와 테드 호프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버금가는 무게를 지닌 것으로, 8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모든 밸리의 상품들은 GUI 개념을 전제로 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초장기 룩 앤 필(Look & Feel)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된 매킨토시 운영체제는 난해한 도스 명령어 체계에 훈민정음 역할을 수행했으며, PC 시장은 이 순간부터 사용자들을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빌 게이츠의 윈도 시리즈와 펜티엄 프로세서가 실질적인 GUI 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티브 잡스의 매킨토시 운영체제는 80년대 중반 실리콘 밸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극명하게 제시했다. 즉, GUI 운영체제는 PC 시장을 한 차원 높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엄의 출현을 앞당김으로써 90년대 중반 디지털 문명의 물꼬를 텄다.

퍼스널 컴퓨터 시장의 문화혁명에 견주는 '리사' 프로젝트는 스티브 잡스 개인에 의해 고안된 것이지만, 1984년 매킨토시가 햇빛을 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본시 잡스는 공동 창업자인 워즈니악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리사 프로젝트는 그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다. 즉 초창기 애플사의 탄생 과정에서 잡스는 워즈니악과 함께 공동 창업자라는 타이틀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밸리에서 그의 존재는 항상 워즈니악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워즈니악은 결코 잡스의 경쟁상대는 아니었지만, 애플사의 성장 과정에서 잡스는 자신의 역할이 상당 부분 평가절하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애플컴퓨터는 누가 뭐라 해도 워즈니악의 작품이었으며, 애플사의 성장 과정에서 잡스의 역할은 그저 수완 좋은 세일즈맨에 불과했다.

그러던 잡스에게 기회가 왔다. 80년대 초반 워즈니악에게 불어닥친 뜻밖의 악재들이 잡스를 애플사의 구심점으로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IBM사가 PC 시장을 총체적으로 개편하던 1981년 워즈니악은 항공기 추락 사고로 애플사의 경영 일선에서 2년이 넘는 공백을 갖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 추진한 록 콘서트 프로젝트가 3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냄에 따라 워즈니악은 애플사의 경영에서 영원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만다. 이쯤되면 잡스가 어떻게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그 출발점은 1979년 우연한 기회에 팔로알토 시에 소재한 제록스 파크(Xerox PARC)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복사기 산업의 선두주자였던 제록스사가 미래 인쇄산업의 표준을 설정하기 위해 설립한 파크연구소는 80년대 후반 실리콘 밸리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근본적인 테크놀로지를 제공했다. 지난 20년간 퍼스널 컴퓨터 시작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주도한 테크놀로지를 평가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윈도와 매킨토시 운영체제로 대변되는 GUI, 휴렛팩커드의 레이저 프린터, 그리고 이더넷(ethernet)이라 불리는 네트워크 테크놀로지를 언급할 것인데, 이 세 가지 기술이 모두 제록스 파크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록스사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자사의 이름으로 상업화시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순수의 시대'로 대변되는 6, 70년대 실리콘 밸리 엔지니어들의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당시 그들이 가장 가치를 둔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였다.

결국 그들의 바람대로 마우스와 풀 다운 메뉴 체제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는 잡스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이 거대 프로젝트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Episode 19. '리사'와 '매킨토시'의 줄다리기

<잠깐! 매킨토시는 프로젝트 명이명서, 운영체제 명이며, 컴퓨터 이름이다. 물론 리사도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즉 코드명 리사와 매킨토시는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그리고 기본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추진하여, 이 세 가지를 모두 하나의 패키지로 판매한 밸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코드명 '리사'는 스티브 잡스의 딸인 리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에서부터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리고 Large Integrated Software Architecture의 약자라는 설까지 매우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지만, 애플사의 내부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리사 프로젝트는 결코 잡스의 지휘하에 일사천리로 추진된 프로젝트는 아니다. 워즈니악이 떠나고 없는 애플컴퓨터사는 누가 뭐라 해도 잡스의 회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보면 겉보기와는 사뭇 달랐다. 애플사의 실질적인 자금줄인 마이크 마큘라는 잡스의 리사 프로젝트를 휴렛팩커드에서 실무 경험을 인정 받은 존 카우치(John Couch)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잡스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워즈니악 다음으로 애플컴퓨터사를 성장시킨 일등 공신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존 카우치라는 풋내기 매니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뺏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마큘라였지만 20대의 젊은 청년 잡스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세상이 불공평했다. 하지만 마큘라의 눈에 비친 잡스는 아직 물불을 못가리는 철부지에 불과했고, 애플사의 미래가 걸려있는 리사 프로젝트는 좀더 실무 경험이 풍부한 카우치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IBM PC의 핵폭격으로 경영상태가 극히 악화된 애플사는 리사 프로젝트를 계기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한다. 워즈니악의 초창기 시대부터 침몰직전까지 애플호의 경영을 책임졌던 마이크 스캇(Mike Scott)은 동반 폭락한 주식과 시장 점유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워즈니악은 은근슬쩍 애플사의 선발진에서 사라져버렸다. 마큘라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의 후임자인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결정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하게 되고, 공석으로 남은 마큘라의 전 자리인 애플사의 회장직은 자연스럽게 스티브 잡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는 애플사의 공동 창업자였으며, 워즈니악이 없는 애플사에서 항상 넘버원으로 활동해왔다. 리사는 존 카우치와 제록스 파크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해온 프로그래머인 레리 테슬러(Larry Tesler)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잡스는 서서히 의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리 테슬러는 1979년 잡스에게 GUI 개념을 브리핑해준 파크연구소의 실무 엔지니어였으며, 그가 리사 프로젝트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잡스에게 리사의 상업화는 이제 시간 문제란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잡스는 리사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프 레스킨(Jeff Raskin)이란 동료 엔지니어의 또 다른 작은 프로젝트였던 코드명 '매킨토시'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리사 프로젝트와 거의 동일하지만, 훨씬 저렴하고 더욱 엔드 유저를 지양하는 GUI PC를 제작하기에 이른다(오리지널 매킨토시는 제프 레스킨에 의해 추진된 초저가형 PC 프로젝트로 600 달러 선의 퍼스널 컴퓨터 제작에 초점을 둔, 말 그대로 리사와는 상극을 이루는 애플사의 비밀 프로젝트였다). 그런 와중에 잡스는 리사의 실패를 직감적으로 예감하게 되었다, 3000 달러 선에서 판매되고 있는 PC 시장에서 최소한 1만 불이라는 고가 정책을 펼쳐야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리사의 상업성에 상당한 회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매킨토시는 리사의 모든 장점을 보유하는 동시에, IBM PC 클론들과 경쟁할 수 있는 저렴한 컴퓨터라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된다.

잡스의 예상대로 매킨토시보다 1년 먼저 시장에 선보인 리사는 사용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존 카우치를 희생양으로 놓고 펼쳐진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의 줄다리기는 스티브 잡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고, 잡스는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혼이 담긴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 1984년 판매된 매킨토시 128K는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정신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토록 떨쳐버리고 싶었던 워즈니악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기쁨도 안겨주었다. 하지만 잡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킨토시가 PC 클론을 상대로 경쟁력 있는 컴퓨터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제2단계인 마케팅 전력에서 새로 부임한 사령관인 존 스컬리와의 성격 차이로 인해, 잡스는 1998년 아이맥(iMAC:Internet Macintosh)으로 화려하게 컴백하기까지 12년간 고독한 유배생황을 하게 된다.

애플사가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으로 모셔온 존 스컬리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컴퓨터의 컴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동부의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추락하는 펩시콜라사에 획기적인 마케팅 전략을 도입해 구사일생으로 살려놓은 업적을 인정받아 애플사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그는 곧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왜 인텔, HP,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전문 기업들이 엔지니어 분야의 경력자를 최고 경영진으로 두는지를 말이다.

존 스컬리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애플사는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를 떠날 무렵 결코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던 빌 게이츠의 매킨토시 모조품인 '윈도 95'에 필적할 어떠한 방어 전략도 세워놓지 못한 채 무릎을 꿇게 된다. 1985년 애플사의 매출액은 15억 달러로 겨우 1억 달러를 육박하던 빌 게이츠의 MS사보다 15배가 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라는 옛말을 입증하듯 잡스가 떠난지 정확히 10년만에 애플사는 아무런 명분도 남기지 못한 채 매킨토시 OS 7 버전보다 기능면에서 전혀 우수성을 인정받지 못한 윈도 95에게 치욕적인 백기를 든 것이다. 애플사는 닫힌 회사였다. 스티브 잡스의 오만함은 애플사 특유의 NIH(Not Invented Here) 주의, 즉 "여기서 발명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심어줬고, 그 결과 외부에서 개발된 알찬 테크놀로지들을 수용하는데 매우 배타적이었다. 게다가 실리콘 밸리의 제1원칙이었던 '볼륨 정책'을 무시한 스컬리는 매킨토시 상품의 마진률을 극대화시키는 데만 힘썼을 뿐, 정작 중요한 시장 점유율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플사는 실리콘 밸리의 변경에서 '두 명의 스티브'를 너무 빨리 잃었고,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데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뒤였다.


Episode 20. 무너진 3인방 체제와 대답 없는 매킨토시

실리콘 밸리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대표적인 회사의 창립과 성장과정을 보면 '3인방' 체제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시작을 알린 HP에는 빌 휴렛, 데이빗 팩커드, 그리고 프레드 테르만이 있었고, 인텔사에는 밥 노이소, 고든 무어 그리고 앤디 그루브가 있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사에는 빌 게이츠, 앨런 폴 그리고 스티브 발머가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핵심 기업들은 초장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이들 '테크노 3인방'체제에 흔들림이 잆었다.

하지만 애플사는 달랐다.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 그리고 마이크 마큘라로 구성된 최초의 3인방 체제는 단 5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1년에 워즈니악을 잃었고, 1985년에는 잡스를 쫓아내 버렸다. 1985년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GUI 시장에서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는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분열로 스스로 자폭의 길을 택한 애플사는 매킨토시라는 혁명적인 컴퓨터를 성공적으로 개발해냈음에도 불구하고, PC 시장을 퇴보시키고 스스로도 퇴보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스티브 잡스의 애킨토시는 충분히 윈텔 진영과 맞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휼륭한 제품이었다. 따라서 애플사의 3인방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었다면, PC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인 구조로 발전했을 것이다. 당연히 일반 사용자들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운영체제의 경쟁 구도로 인해 사용환경도 훨씬 편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사는 모든 것을 혼자 얻으려 했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 초창기 퍼스널 컴퓨터를 보편화시키겠다는 '두 명의 스티브'의 야심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실리콘 밸리와는 무관한 경영진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된 애플사는 '3인방'의 분열 이후 단 한번도 그들의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애플사의, 아니 스티브 잡스의 지극히 개인적인 실수는 그 후 10년 동안 도미노 현상처럼 모든 PC 산업 전체에 영향을 끼쳤으며, 1985년 애플사를 등지며 떠나는 그를 아쉬워하는 애플사의 직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매킨토시를 중심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려 지속된 잡스와 애플사의 실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컬리와의 마찰보다는 훨씬 원론적인 곳에 그 이유가 있었다. 잡스는 매킨토시 비전을 상품화하는데 모든 정열을 쏟았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매킨토시의 보편화 부분은 소홀히 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많은 사람들은 잡스가 애플사를 떠난 후 스컬리와 마큘라가 미온적으로 취한 매틴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 시비에 실패의 일차적인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만, 사실 리사란 프로젝트는 애당초 애플사의 R&D 규모에서 소화해 낼 수 있는 스케일의 프로젝트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잡스는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PC 시장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했다.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애당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 분리되어 추진됨이 옳았다. 애플사의 규모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무리였으며, IBM사의 OS/2가 입중하듯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회사는 실리콘 밸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애플사가 소프트웨어 분야를 독립 회사로 키워나갔다면, 1992년 윈도 95와 정면 충돌을 예고하다 절반의 쿠데타로 그친 매킨토시 OS의 인텔 플랫폼 프로젝트였던 스타트랙(Star Trek)은 틀림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며, 매킨토시 OS는 지금 보다 훨씬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모토롤라 파워PC 프로세서는 물론, 인텔 기반의 프로세서로도 효율적으로 운용되면서 윈도 운영체제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오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에 양다리 정책을 펼쳐왔듯이, 애플사도 필연적으로 인텔 호환 칩에 매킨토시 OS의 승부수를 띄웠어야만 했다. 윈도 95가 출시되었을 때, 대부분의 매킨토시 애플리케이션들은 마치 리그에서 제명되었다 부활된 선수들처럼 윈도 플랫폼 리그로 철새들처럼 이동해 버렸다. 애플사의 전자출판 시장과 오디소/비디오 시장의 영원한 혈맹으로 간주되었던 어도비사의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알더스사의 페이지 메이커, 매크로미디어사의 디렉터 등의 애플리케이션들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플랫폼의 이동을 순식간에 단행해버렸고, 애플사는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최악의 상황으로 스티브 잡스의 아이맥이 혜성처럼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코마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매킨토시 OS는 인텔 프로세서의 플랫폼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지니고 있었다. 애플사에서 스핀오프된 대표적인 두 회사인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스텝(NeXT Step)과 장 루이 가세(Jean Louis Gassee)의 비오에스(Be OS)는 애플사 엔지니어들의 10분의 1도 안되는 인력으로 보란 듯이 인텔 프로세서에 GUI 운영체제를 선보이면서, 애플사가 얼마만큼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기업인가를 전세계에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만약 잡스가 매킨토시 OS를 리사 프로젝트와 독립하여 진행하였다면, 스티브 잡스는 존 스컬리와 한 배를 탈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고, 애플사는 델사나 컴팩사처럼 스컬리의 천재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회사와 잡스의 비전으로 윈도 시리즈를 포함한 어떤 플랫폼에서도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잡스와 스컬리의 싸움이 극에 달했던 1985년 여름, 애플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지난 5년간 애플사의 자금줄을 담당하던 워즈니악의 애플 시리즈는 수명을 다했고, 쉬운 컴퓨터를 내세웠던 매킨토시 128K 모델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는 초보 사용자들에게 호응 받기보다는 PC 플랫폼의 난해한 도스 아키텍처에 염증을 느낀 포스트 PC 사용자들에게 어필함에 따라, 잡스가 애당초 원한 매킨토시의 비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 첫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물론 때마침 불어닥친 레이저 프린터 기술과 GUI 플랫폼이 지닌 장점 중의 하나인 그래픽과 텍스트를 융합할 수 있는 레이 아웃 포맷 테크놀로지는 애플사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며 전자출판 시장을 개척해 주었다. 하지만 포스트스크립트로 대변되는 존 워낙(John Warnock) 사단의 어도비 테크놀로지는 쓰러져 가는 애플사에 단비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 잡스가 애초에 구상한 차세대 운영체제의 보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최고'와 '최초'의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최다'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말았다.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사를 떠날 때까지도, 실리콘 밸리의 제1의 생존 원칙을 경시했다. 잡스가 이 볼륨의 원칙을 숭배하기까지 애플사는 12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가 돌아왔을 땐 이미 깃발은 쓰러지고 둥지만 남아있었다. 1985년 9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의 주주 총회에서 스컬리에게 직격탄을 던졌다. "당신은 결코 애플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잡스가 애플사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던진 이 한 마디는 존 스컬리의 심장을 강타했고, 애플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스컬리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워즈니악과 함께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에서 애플컴퓨터를 탄생시키며 퍼스널 컴퓨터 시장을 개척했고, IBM PC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GUI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또 다시 한번 세상을 변모시킨 스티브 잡스는 정든 쿠퍼티노의 밴들리 식스 빌딩을 빠져 나오면서, 밑지긴 했지만 아직 거덜나지 않은 장사꾼의 마음으로 또 다른 한 판을 준비하게 된다. 두 번이나 밸리의 변경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다 내분으로 좌초하게 되는 1985년 9월, 스티브 잡스는 걸어온 길보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먼 스물 아홉의 피끓는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