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6. 세상에 뿌려진 윈도만큼...
1995년 7월 14일 미국 워싱턴 주 레드먼드(Redmond)시에 위치한 MS 본사의 작은 건물에는 여러 박스의 샴페인이 배달되면서 모종의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다. 샴페인을 손에 쥔 초췌한 모습의 한 프로그래머는 "이제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라는 환희에 섞인 외침과 함께 지난 3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한 윈도 95 운영체제의 1,400만 줄에 달하는 코드가 완성된 기쁨을 뇌까리고 있었다. 1992년 초부터 3년 6개월간 코드와의 전쟁을 치룬 이 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PC 시장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려보면서, '시카고 프로젝트'의 쫑파티를 만끽했다.
빌 게이츠가 MS사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 온 시카고 프로젝트는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기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5년 8월 25일을 D-데이로 전세계 PC 운영체제 플랫폼의 GUI 혁명을 단행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8월 24일 사용자들의 한마당 잔치를 뒤편에서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윈도 95의 출시는 말 그대로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세계인의 대축제였다. 자본주의 탄생 이래 한 상품의 출시를 놓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광분한 적은 없었다. 윈도 95라는 상품을 축으로 형성된 주변 상품들의 마케팅 전략과 윈도 마니아들의 카운트다운 공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윈도 95 파티는 전세계의 PC 산업에 유례없는 호황을 선사해 주었다. 윈도 95의 출시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486에서 펜티엄 프로세서로 대전환을 시작했고, 16메가 메모리 칩, 기가바이트가 넘는 하드 드라이브, CD-ROM 드라이브 그리고 15인치 이상의 대형 모니터들의 표준화는 PC 시장의 규모를 순식간에 두 배로 확장시켜 버렸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산업과 같은 직접 관련 산업은 제외하더라도, 윈도 95의 열풍은 PC 관련 출판 산업, 기업 및 일반 사용자들의 정보 서비스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 상품과 같은 간접 산업들로 확산되었고, PC 시장은 GUI 운영체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실리콘이 파생시킬 수 있는 각 종 간접 산업을 새롭게 태동시키거나 기존의 PC 상품들을 한 단계 진화시켜 나갔다.
"드디어 원시적인 도스 운영체제를 탈피한 꿈의 GUI 운영체제가 PC 시장에 상륙하다!" 세계 유력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통해 소개된 윈도 95는 빌 게이츠가 단순히 홍보비로만 2억 5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대작에 걸맞게 전세계 PC 사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식 판매일을 일주일이나 앞둔 8월 중순부터 윈도 95를 1초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는 마니아들의 사전 주문은 대부분의 통신판매 업체들의 업무를 일찌감치 마비시켜 버렸고, 출시 전야인 8월 23일에는 각 대도시 대형 컴퓨터 매장이 마치 비틀스의 존 레논이 환생해 사인회를 개최한 것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해질 무렵부터 침낭을 어깨에 맨 마니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구상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호주 시드니 항구의 대형 부두에는 4층 건물 규모의 윈도 95 상자가 공중에 매달려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날 호주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들에게 윈도 95를 무료로 배포한다는 소식과 함께 낭만의 도시 시드니는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거렸고, 이웃 국가인 뉴질랜드의 한 학생이 8월 24일 0시 1분을 기해 구입한 제1호 윈도 95를 시작으로 디지털 지구촌은 윈도 물결로 요동치게 된다.
지구가 자전을 거듭하면서, 자정을 넘긴 영어권 국가 대도시들의 PC 마니아들은 한결같이 윈도 95의 마법에 이끌려 컴퓨터 매장으로 달려나갔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 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면을 뒤덮은 윈도 95 로고로 장식된 대형 배너는 자정을 넘기면서 윈도 95의 공식 테마곡인 롤링 스톤즈의 '스타트 미 업(Start Me Up)'을 내보내 빌 게이츠가 제공하는 '미래로 가는 길'에 동참하려는 PC 마니아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렇게 윈도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는 전세계적 신드롬으로 널리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D-데이였던 8월 24일의 태양은 빌 게이츠를 위해 떠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S사의 본사가 위치한 워싱턴 주 레드먼드 시의 야외 캠퍼스에는 아카데미 시상식도 훌륭히 치를 수 있는 규모의 초대형 야전 텐트가 15개가 설치되는 등 지상 최대의 컴퓨터 관련 축제의 축포를 터뜨릴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2,500명이 넘는 취재진과 PC 관련 산업의 게스트들도 윈도 95가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킬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 최고의 인기 토크쇼 사회자인 제이 레노(Jay Leno)가 이 날 자축연의 사회자로 깜짝 출연하면서 전세계 매스컴들은 MS사의 윈도 95 출시 기념 파티를 마치 월드컵 결승전을 중계하듯이 특종으로 위성 중계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윈도 95의 출시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진풍경을 20년 남짓한 PC 역사상 최고의 대사건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사실 1995년 8월 중순부터 불기 시작한 윈도 95의 열풍은 하나의 상품 출시를 놓고 일어난 해프닝치고는 산업혁명으로 비롯된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들을 세워나갔다. "95번을 깔아야 제대로 깔린다"라는 일부 사용자들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윈도 95는 데뷔와 함께 소프트웨어 시장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면서 출시 6개월만에 2,000만 개라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빌 게이츠의 부와 명예는 세상에 뿌려진 윈도만큼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으며, 이제 PC 산업의 모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이란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엔 빠짐없이 MS사와 빌 게이츠가 언급되고 있다. 1975년 여름, 불과 19세의 나이로 창녀들이 득실거리는 뉴멕시코주 알버커키 시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간판을 올린 지 정확히 20년 만에 윌리엄 게이츠 3세는 PC 시장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왕좌에 등극하게 되었으며, 40세 생일을 두 달 앞둔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물이라는 또 하나의 칭호를 얻게 된다.
전 세계의 PC 사용자들과 행사장에 초청된 대부분의 PC 산업 관련 게스트들이 윈도 95의 대성공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그러나 빌 게이츠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휘말리게 된다.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긴 윈도 95의 뒤늦은 출시는 빌 게이츠와 MS사가 염두에 두고 있던 프로젝트들 대부분의 불가피한 연기를 의미했다. 빌 게이츠 자신이 정확히 15년 전 PC 운영체제의 표준을 정립하면서 단 한 번의 시련 없이 오늘의 영광을 일구어낸 전례를 답습이라도 하듯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영국의 한 풋내기 프로그래머인 팀 버너스 리에 의해 개발된 HTML이라 불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는, 윈도 95의 모체인 시카고 프로젝트가 추진될 시점만 해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모자이크커뮤니케이션(Mosaic Communication)이라는 작은 회사에 의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전혀 생소한 영역을 일구어나가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 프로젝트를 시카고 프로젝트와 동시에 추진하기는 불가능했다는 현실적 논리와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의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과소 평가한 실수를 깨끗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PC 시장의 모든 거물 프로젝트들이 표준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주인공 역할을 놓쳐본 기억이 없는 MS사 입장에서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월드와이드웹 시장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인터넷이란 미디엄(medium)의 중요성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진 것이 전혀 없었다. 90년대 초, 대부분의 유닉스 기반 사용자들이 TCP/IP라는 공용 프로토콜을 설립하여 인터넷 정보의 흐름에 대한 표준을 설정할 때, MS사의 애플리케이션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스티브 발머는 TCP/IP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 분야를 이끌어온 삼두마차인 아메리카온라인(AOL), 컴퓨서브(CompuServe) 그리고 프로디지(Prodigy)의 아성에 철퇴를 가할 것을 은근히 기대해 온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MSN) 프로젝트의 침몰은 MS사를 인터넷의 중심 궤도에서 완전히 탈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 법무성의 삼엄한 독과점 규제에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윈도 95 패키지 안에 포함시킨 MSN 서비스가 윈도 95로 업그레이드하는 상당수의 사용자들이 선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싸늘하게 외면당함으로써 빌 게이츠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MS사의 인터넷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빌 게이츠는 또 다른 추격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대륙의 개척을 놓고 펼치게 될 이 새로운 한 판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물량 싸움을 이루어 온 과거의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빌 게이츠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전혀 없는 게릴라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윈도 95와 함께 뚜껑이 열린 이 판도라의 상자는 빌 게이츠의 예상을 완전히 초월해 가면서 미래로 가는 진정한 길을 보여주었다.
빌 게이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난 5월 극비리에 수석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돌린 '인터넷 물결(Internet Tidal Wave)'이란 제목의 메모를 MS사가 앞으로 추진하게 될 프로젝트들 가운데 최고의 우선 순위로 선정하면서, 인터넷이라 불리는 정글에 익스플로러(Explorer)라는 신무기를 투입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Episode 27. 실리콘 밸리의 터미네이터
지난 1월부터 진행된 '실리콘 밸리 스토리'의 제1부 에피소드들에는 빌 게이츠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많은 독자들이 분명 PC 산업의 절반 이상으로 성장한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기적적 성공담이 빠져버린 것을 의아해 할 것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빌 게이츠는 실리콘 밸리의 인물이 아니며,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성장한 실리콘 밸리의 지도상에는 빌 게이츠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정확히 25년 전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는 물론 캘리포니아 주에 조차 한 번도 연고를 두지 않고 지금까지 사업을 추진한 매우 독특한 기업이다. 사실 실리콘 밸리에 적을 두지 않고 PC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부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IBM사를 선두로, 한 때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미치 카포의 로터스사도 보스턴의 '루트 128'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으며, 현재 네트워크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노벨사 또한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Salt Lake) 시에 기반을 둔 회사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아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나 모토롤라사 역시 서부 지역과는 무관하게 성장했지만 실리콘 밸리의 팽창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의 성공담은 시작부터 실리콘 밸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들의 성장 과정은 지리적 위치의 차이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밸리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해왔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앞에서 언급한 아웃사이더 기업들 중의 하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PC 시장을 언급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명사처럼 부각되어 버린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담은 분명 실리콘 밸리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많은 사건들의 주인공이지만, 애석하게도 실리콘 밸리의 터줏대감들인 디지털리서치사, 애플사, 휴렛팩커드사, 썬마이크로시스템사, 그리고 실리콘그래픽사사는 빌 게이츠의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PC 시장에서 가장 운이 놓은 남자, 소프트웨어 시장을 실리콘 밸리에서 도려내 간 장본인, 밸리의 낭만주의자들을 매몰차게 몰아낸 현실주의자, 그리고 윈텔이라는 제국주의로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을 종속 관계로 탈바꿈시킨 혁명주의자 등이 실리콘 밸리가 빌 게이츠에게 부여한 여러 수식어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에 '윈텔'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했으며, 그들이 일구어낸 거대한 제국은 실리콘 밸리의 대부분의 기업들을 '안티-윈텔'이라는 새로운 연합 체제로 몰아버렸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위협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을 여러 각도에서 조율하고 있다.
무일푼으로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시에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를 선보인 에드 로버츠의 미츠사를 배신하면서 실리콘 밸리로 진입한 빌 게이츠는, 당시 PC 시장에서 운영체제의 표준을 설정한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를 교묘한 상술로 도용하여 'MS-DOS'라는 새로운 표준 설정으로 입지를 확보했다. 그 후 애플사 몰락 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로서 혹은 IBM사의 후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기업으로서, MS사는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태양계에 존재하는 별은 아니지만 이 곳에서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는 모든 위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소 공급책 역할을 하는 공룡 기업으로 자라났다.
제2부인 '윈텔과 안티-윈텔'은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의 신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앞으로 3개월에 걸쳐 진행될 윈텔의 성공담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텔사의 성공담인 동시에 실리콘 밸리의 많은 천재들을 좌절시킨 비극적 사건들로서, 필자는 애플사의 매킨토시 라이선싱 비화를 시작으로 게리 킬달과의 DOS 분쟁, 그리고 IBM사와의 줄다리기를 마지막으로 윈텔과 안티-윈텔의 성장 과정을 가감없이 기술해 보려고 한다.
Episode 28. 적진에서 날아든 한 통의 편지
잡스와 스컬리의 당쟁 파동이 극에 달한 1985년, 애플사는 잡스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으로 유례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며,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존 스컬리와 그의 영원한 2인자 장 루이 가세는 애플사의 모든 정책을 좌우할 수 잇는 독재 체제를 견고히 다지면서 쓰러져가는 애플사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무너진 잡스와 그를 따르던 엔지니어들은 애플사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객체 지향 테크놀로지의 핵으로 자라날 넥스트(NeXT)사라 불리는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하기 위해 분주했으며, 애플사의 자금책을 담당하던 마이크 마큘라 또한 지난 1년간의 내분으로 잃어버린 시장을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치면서 포스트 스티브 시대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5년간 밸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가속도가 붙어 있었고, PC 시장의 유례없는 호황은 스컬리에게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보편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적어도 룩 앤 필(Look & Feel)로 일반 사용자들에게 알려진 매킨토시 운영체제와 강력한 연산 기능을 갖춘 모로톨라사의 68000 프로세서는, 적진으로 간주되던 MS사의 DOS와 인텔사의 X86 프로세서로 기반을 닦은 PC 클론 플랫폼보다 테크놀로지 면에서 족히 2~3년은 앞서가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에서의 1년은 거의 한 세대를 의미할 만큼 큰 것이며, 그만큼 당시 애플사의 테크놀로지는 PC 시장의 모든 분야에서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1985년 6월 25일, 존 스컬리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한 통의 비밀 문서를 받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문서를 보낸 이는 앞으로 처절하게 진행될 애플사의 몰락에서 주연을 담당하게 될 빌 게이츠였다. 애플사는 이 편지를 통해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결정함은 물론 '윈텔'과 '안티-윈텔'이라는 새로운 판짜기에 도화선 역할을 주도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애플사의 악령으로 둔갑하게 될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빌 게이츠의 비밀 편지가 존 스컬리의 책상 위에 도착한 1985년 6월 25일, 애플사는 정체되어 있던 매킨토시 판매 실적으로 과거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고 침몰해 가고 있었지만, 잡스와 워즈니악이 이끌던 애플 II 기종의 호황 시절에 기록한 애플사의 매출액은 한 때 인텔사와 MS사의 총 매출액을 합친 금액을 넘어섰으며,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스컬리가 이끄는 애플사는 여전히 IBM사와 HP사를 제외한 모든 PC 기업들 중 부동의 정상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애플사의 눈에 비친 빌 게이츠는 작은 중소기업을 힘들게 이끌어가는 수완 좋은 경영자에 불과했으며,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나 엔지니어적 능력은 밸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준은 못 되었다.
GUI라 불리는 새로운 메타포를 전제로 하드웨어 아키텍처에서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까지 하나의 통합된 플랫폼으로 제작된 꿈의 PC인 매킨토시는 모든 면에서 PC 테크놀로지의 상징이었다. 그런만큼 애플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앞으로 진행될 PC 시장의 표준 정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데엔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매킨토시는 80년대 중반 실리콘 밸리가 일구어낸 최대의 상품이었고, 애플사가 이 골든 차일드를 어떻게 성장시키느냐에 따라 밸리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간주되고 있었다. 애플사는 밸리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와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정상의 기업이었고, 매킨토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중소기업들은 애플 타운 쿠퍼티노의 밴들리 빌딩 주변을 맴돌면서 팽창해가는 PC 시장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되는 떡고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PC 클론 시장의 운영체제 표준으로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 카포의 로터스 1-2-3의 출현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의 제1인자 자리를 빼앗긴 MS사의 빌 게이츠에게도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영부영 내어준 왕좌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난제였다. 당시 빌 게이츠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면 대결이 아닌 막강한 애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군주 국가로서 생존하는 사대주의 전략 뿐이었다. 즉,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이끌어냄으로써 MS사의 사업 기반을 PC 클론과 매킨토시라는 양대 진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운영체제보다는 애플리케이션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데 전력투구한다는 것이 그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것이 80년대 중반 빌 게이츠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빌 게이츠의 편지는 애플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직 애플사에서조차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는 맥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를 뜬금없이 제3의 인물이 나타나 감 놔라 떡 놔라 하는 것이 애플사 측에서는 사뭇 황당한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애플사의 엔지니어들을 제외한다면, 지구상에서 매킨토시라는 컴퓨터를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였으며, 빌 게이츠가 당시 직면한 매킨토시의 표준화 실패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몰락과도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1984년 매킨토시가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직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맥 전용 그래픽, 스프레드시트,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애플리케이션을 공급하기로 비밀리에 계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로터스 1-2-3의 출현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의 군주 자리를 풋내기 미치 카포에게 빼앗긴 빌 게이츠의 상처받은 자존심 또한 매킨토시 시장을 우선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그의 의지를 존 스컬리 이상으로 부풀려놓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로터스 1-2-3의 출현은 애플리케이션 분야의 선두를 고수하고 있던 MS사의 베스트셀러 스프레드시트, 멀티플랜(Multiplan)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빌 게이츠가 운영체제인 MS-DOS의 로열티로 벌어들이는 금액 역시 미치 카포가 로터스 1-2-3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판매해 벌어들이는 금액과는 천문학적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로터스 1-2-3와 MS-DOS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빌 게이츠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킨토시 플랫폼에 그의 비밀 병기인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우선적으로 선보이게 될 샌드(SAND)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만들었다.
초창기 DOS 플랫폼에 적용시키기 위해 추진된 MS사의 샌드 프로젝트는 매킨토시의 출현 이후 GUI 플랫폼으로 전환되어 MS사의 프로그래머들의 절반을 투입해 진행된 MS사 최대의 프로젝트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으며, 매킨토시의 상업적 성공은 빌 게이츠가 미치 카포의 독주에 제동을 걸 유일한 방안으로 간주되었다. 엑셀이라는 스프레드시트의 모체가 될 샌드 프로젝트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매킨토시의 상업적 성공이 전제되어야만 했고, 급기야 빌 게이츠는 자신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스티브 잡스가 전선에서 물러나 틈을 이용해 순진한 존 스컬리와 돈 키호테 장 루이 가세를 설득하기 위해 비밀 문서를 발송하기에 이른 것이다.
Episode 29. 매킨토시에 대한 빌 게이츠의 견해
빌 게이츠의 편지는 애플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일부 엔지니어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거론되던 맥 운영체제의 라이선스 이슈가 애플사는 물론 실리콘 밸리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며, 애플사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회사 창립 후 처음으로 두 명의 스티브를 완전히 배제한 체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의 쌍두마차 체제를 실리콘 빌리에 공고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1985년 6월 불어닥친 매킨토시 라이선스 이슈는 회장직을 맡고 있던 스티브 잡스를 같은 해 9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를 떠날 때까지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제외시키면서 1998년 아이맥으로 컴백하기 이전까지 그를 실리콘 밸리의 아웃사이더로 전락시키고 만다. 빌 게이츠가 개인적으로 보낸 이 비밀 문서는 "애플사는 PC 시장의 테크놀로지를 주도하는 부동의 선두주자이며, 애플사의 매킨토시는 PC 시장의 표준을 반드시 탑재해야 된다"라는 호소체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었다. 아울러 애플사가 모든 면에서 PC 시장을 주도해 나갈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잇다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PC 시장의 표준화 설정은 IBM사조차도 자력으로 단행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요소를 갖춘 이슈로서, 앞으로 정착될 GUI 운영체제 표준 설정 과정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애플사가 현실적으로 맥 운영체제를 라이선스하는 것이 PC 시장과 자사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애플사의 자력 회생에 관한 쟁점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었다. 즉, 매킨토시가 애플사의 독과점 정책으로는 PC 시장의 표준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 IBM사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의 라이선스화로 짧은 시간에 전세계의 중소 PC 관련 업체로 하여금 PC 클론의 미비한 구석구석을 보완하게 하여, 가장 안정적인 PC 플랫폼으로 정착하게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현재 PC 클론 플랫폼은 매킨토시보다 100배가 넘는 기업들과 엔지니어들이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으며, 단기간 내에 매킨토시의 운영체제가 PC 플랫폼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반 PC 업체들에 라이선스되지 않는다면 애플사의 미래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빌 게이츠는 이 비밀 문서에 매킨토시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견해와 함께 애플사가 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라이선스 전개도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친절함을 보이는데, 그는 여기서 애플사가 독점으로 PC 시장의 표준을 설정할 수 없는 다섯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경쟁 부재의 매킨토시 시장은 '높은 가격'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두 가지 불합리한 요소로 인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외면을 당할 것이다.
둘째, 애플사의 독점 체제는 상대적으로 느린 성능을 지닌 매킨토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쟁력에 비해 지속적인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PC 클론 플랫폼의 향상 속도에 결코 해법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세째, 최근 일어나고 잇는 애플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애플사의 신뢰성은 물론 PC 시장에서 매킨토시 독과점의 장기적 성공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넷째, 현재 대기업을 상대로 한 애플사의 소규모 판매 전략은 규모면에서나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PC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잡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다섯째, 매킨토시 시장을 세계적으로 넓히기 위해서는 각 국가에서 신용을 인정받는 지역 PC 업체들의 매킨토시 공급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애플사의 독점 체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될 이 다섯가지 이유는 빌 게이츠가 개인적으로 왜 매킨토시 운영체제가 현 시점에서 IBM사의 PC 플랫폼처럼 라이선스화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한 것으로, 14년이 지난 지금 애플사가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이러한 자신의 의견과 더불어 애플사가 매킨토시의 라이선스를 제공해도 될 만한 기업들의 리스트도 함께 첨부하였는데, 이 때 거론된 기업들은 모두 MS사가 애플사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반응을 비밀리에 사전 조율한 후 거의 확답을 받아놓은 상태였다는 것이 이 문서가 일반에 알려지면서 흘러나온 지배적인 후문이다.
빌 게이츠가 추천한 기업들은 미 대륙, 유럽, 그리고 아시아 대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기업의 라이선스 문제를 접촉할 임원의 구체적인 이름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미 대륙은 AT&T사를 시작으로 디지털이큅먼트사,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 휴렛팩커드사, 제록스사, 코닥이스트만사, 그리고 모토롤라사까지 애플사의 기본 시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비경쟁 대상 기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유럽 시장은 시맨스사, 올리베티사, 그리고 필립스가가 적격이며, 아시아 대륙은 소니사가 매킨토시 클론을 가장 이상적으로 제작 판매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문서는 마지막 부분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PC 클론 플랫폼의 운영체제를 OEM 방식으로 배포하면서 최고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며, 애플사가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OEM화를 결정할 경우 필요한 모든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담고 있어, 말 그대로 준 사업 계획서 이상의 의미를 담은 문서라고 할 만하다.
빌 게이츠는 시간이 없었다. 누구의 잣대로 해석해도 애플사의 매킨토시는 PC 클론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우수한 테크놀로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빌 게이츠는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조만간 단행될 라이선스에 MS사가 배제되어서는 결콘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이 비밀 문서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실리콘 밸리의 폭풍의 눈으로 자라난 애플사의 GUI 테크놀로지는 모든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어떤 기업도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애플사의 D-데이가 언제냐는 것인데,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애플사의 라이선스 이슈를 백지화시키면서 외로운 오디세이의 항해에 닻을 올리고 만다. 그러나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는 자신들의 고립화 정책이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가를 것이라는 예측보다는 지속적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는 애플사의 매출액을 상승시키기 위한 묘책에만 모든 열정을 바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14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혁명의 주도적 위치에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바라본 스컬리와 가세의 실책은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가르면서 윈텔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탄생시켰으며, 그들은 팽창의 속도가 날로 가속화되어 가는 밸리에 또 하나의 철칙을 선사하고 말았다.
"쏠 수 있는 총알은 단 한 방이며, 표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진다."
Episode 30. 그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고기를 낚으려 한 사나이
즉각적인 반응을 예상하면 보낸 빌 게이츠의 프로포즈에 대한 애플사의 반응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한동한 묵묵부답으로 일관되었다. 라이선싱 쟁점의 궁극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던 스컬리와 가세는 밸리의 대세를 무시한 채 소극적인 자세로 돌변했고, 기다리다 지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일급 참모인 제프 레익스(Jeff Raikes)의 조언을 강구하게 된다.
사실 애플사로 발송된 비밀 편지의 원본 작성자는 빌 게이츠가 아닌, 80년대 초반 애플사에서 망명한 레익스라는 매니저로서, 빌 게이츠는 그의 아이디어에 애플사가 접촉할 만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발송한 것에 불과했다. 레익스는 잡스와 같이 20대의 젊은 나이로 애플사의 엔지니어 팀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잡스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는 신예 참모였지만, 그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합류해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애플사와의 인연을 정리하였다. 레익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로 망명하여 훗날 윈텔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게 될 빌 게이츠의 '아홉 기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스티브 잡스는 레익스가 빌 게이츠 진영으로 옮겨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조만간 부도가 날 기업이다."
스티브 잡스가 어떤 근거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레익스를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합류시키려는 설득 작업을 했는지는 몰라도, 레익스란 인물은 애플사에선 몇 안 되는 미래 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는 MS-DOS가 PC 클론 시장의 표준을 설정할 무렵, 실리콘 밸리의 대세는 더 이상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확신을 내렸으며, 80년대 초반 그 누구보다 일찌감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가능성을 감지했다. 레익스가 떠날 때 잡스가 던진 이 한마디는 빌 게이츠에게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됐으며, 어쩌면 스티브 잡스는 무의식중에 던진 이 한마디처럼 80년대 중반 오픈 매킨토시 정책을 추진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잡스는 더 이상 애플사의 지휘관이 아니었으며, 애플사는 펩시맨 존 스컬리와 매킨토시 테크놀로지를 마치 종교처럼 숭배하는 가세에 의해 좌우되는 지극히 평범한 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보낸 제안데 대한 애플사의 공식 반응이 늦어지자 존 스컬리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빌 게이츠가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를 독촉하기 위해 건 이 한 통의 전화는 앞으로 전개될 애플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처절했다. 전화를 받은 스컬리는 빌 게이츠에게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이 없다고 단언함은 물론, 오히려 빌 게이츠에게 어떤 식으로 라이선스가 단행되어야 하는지 되물을 정도로 PC 시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게 약"이란 옛말이 있듯이 스컬리는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구체적인 사전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된다.
문제는 장 루이 가세에게 있었다. 그는 애플사의 엔지니어 분야를 총괄적으로 감독하는 임원으로서 목숨을 걸고 매킨토시의 폐쇄성을 끝까지 고수하고 만다. 가세는 애플사의 NIH(Not Invented Here)주의인 "여기서 발명되지 않았으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애플식 사고를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주입시킨 주인공이었으며, 매킨토시를 단순한 컴퓨터가 아닌 종교적 의미로까지 받아들이려 한 극단주의자였다. 그는 스컬리의 제인에 따라 댄 아일러(Dan Eiler)라는 마케팅 매니저에 의해 진행된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란 주제의 브리핑에서 단호히 매킨토시의 독과점을 부르짖었다.
아일러에 의해 진행된 매킨토시 라이선스화의 요지는 간단했다. 현재 대세로 굳어지고 잇는 MS사의 도스 플랫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PC 클론 플랫폼에 적용시키는 방법뿐이라는 사뭇 극단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석상에서 장 루이 가세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아일러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한심한 발상이라며 일축해 버리고 만다.
장 루이 가세가 매킨토시의 독과점을 부르짖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매킨토시라는 컴퓨터는 PC 클론과 달리 설계 과정에서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미세한 조화를 이루며 제작된 컴퓨터로서,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따로 떼어내어 PC 클론에 접목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혈액형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둘째, 매킨토시로 애플사가 한 해 올리는 매출액은 20억 달러로 70만 대를 판매할 수 있는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지만, 라이선스가 단행되어 PC 클론 시장의 연 판매 대수인 400만 대에 탑재될 PC 전용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로열티를 100달러로 추정한다 해도 4억 달러의 매출액에 지나지 않으며, 이 순간 매킨토시 하드웨어의 시장은 붕괴된다는 결론이었다.
돌이켜보면, 장 루이 가세의 주장은 실로 한심한 발상이었을지는 몰라도 당시 애플사의 임원들은 가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애플사의 직원들은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매킨토시에 대한 엘리트 의식이 팽배해 있었고, 매킨토시를 PC 클론과 비교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가세가 주장하는 애플 차별주의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가 감히 매킨토시를 난잡한 PC 클론과 비교한단 말인가? 가세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뻗어나간 애플 프라이드 슬로건은 라이선스 분쟁을 일단락지음과 동시에 애플사가 밸리의 중원을 호령하는 대표 기업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요인이 되고 만다.
가세가 주장한 매킨토시의 독점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윈도 95가 출시되면서 수면 밑으로 침몰하는 애플호를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가세는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미국의 한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신의 판단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 졸속 처사였음을 깨끗이 인정하면서, 실리콘 밸리가 이렇게 거대한 디지털 문명을 만들어놓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애플사의 몰락에 자신의 과오가 일차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장 루이 가세는 실로 돈 키호테적인 인물이다. 1985년 모든 가능성을 일축하며 오픈 매킨토시 정책에 쇄기를 받은 장 루이 가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픈 맥(OPEN MAC)이라는 자동차 번호판을 달고 실리콘 밸리를 휘젓고 다녔으며, 맥 포터블(Mac Portable)의 참패로 애플사를 이탈한 후 그가 창립한 비(Be)OS사는 인텔 프로세서 플랫폼에 보란 듯이 매킨토시와 매우 흡사한 운영체제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장 루이 가세는 그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고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은, 실리콘 밸리가 창출한 세기의 낭만주의자이며, 아직도 억센 프렌치 악센트로 대화를 구사하는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돈 키호테임이 분명하다.
1995년 7월 14일 미국 워싱턴 주 레드먼드(Redmond)시에 위치한 MS 본사의 작은 건물에는 여러 박스의 샴페인이 배달되면서 모종의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다. 샴페인을 손에 쥔 초췌한 모습의 한 프로그래머는 "이제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라는 환희에 섞인 외침과 함께 지난 3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한 윈도 95 운영체제의 1,400만 줄에 달하는 코드가 완성된 기쁨을 뇌까리고 있었다. 1992년 초부터 3년 6개월간 코드와의 전쟁을 치룬 이 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PC 시장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려보면서, '시카고 프로젝트'의 쫑파티를 만끽했다.
빌 게이츠가 MS사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 온 시카고 프로젝트는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기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5년 8월 25일을 D-데이로 전세계 PC 운영체제 플랫폼의 GUI 혁명을 단행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8월 24일 사용자들의 한마당 잔치를 뒤편에서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윈도 95의 출시는 말 그대로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세계인의 대축제였다. 자본주의 탄생 이래 한 상품의 출시를 놓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광분한 적은 없었다. 윈도 95라는 상품을 축으로 형성된 주변 상품들의 마케팅 전략과 윈도 마니아들의 카운트다운 공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윈도 95 파티는 전세계의 PC 산업에 유례없는 호황을 선사해 주었다. 윈도 95의 출시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486에서 펜티엄 프로세서로 대전환을 시작했고, 16메가 메모리 칩, 기가바이트가 넘는 하드 드라이브, CD-ROM 드라이브 그리고 15인치 이상의 대형 모니터들의 표준화는 PC 시장의 규모를 순식간에 두 배로 확장시켜 버렸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산업과 같은 직접 관련 산업은 제외하더라도, 윈도 95의 열풍은 PC 관련 출판 산업, 기업 및 일반 사용자들의 정보 서비스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 상품과 같은 간접 산업들로 확산되었고, PC 시장은 GUI 운영체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실리콘이 파생시킬 수 있는 각 종 간접 산업을 새롭게 태동시키거나 기존의 PC 상품들을 한 단계 진화시켜 나갔다.
"드디어 원시적인 도스 운영체제를 탈피한 꿈의 GUI 운영체제가 PC 시장에 상륙하다!" 세계 유력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통해 소개된 윈도 95는 빌 게이츠가 단순히 홍보비로만 2억 5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대작에 걸맞게 전세계 PC 사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식 판매일을 일주일이나 앞둔 8월 중순부터 윈도 95를 1초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는 마니아들의 사전 주문은 대부분의 통신판매 업체들의 업무를 일찌감치 마비시켜 버렸고, 출시 전야인 8월 23일에는 각 대도시 대형 컴퓨터 매장이 마치 비틀스의 존 레논이 환생해 사인회를 개최한 것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해질 무렵부터 침낭을 어깨에 맨 마니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구상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호주 시드니 항구의 대형 부두에는 4층 건물 규모의 윈도 95 상자가 공중에 매달려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날 호주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들에게 윈도 95를 무료로 배포한다는 소식과 함께 낭만의 도시 시드니는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거렸고, 이웃 국가인 뉴질랜드의 한 학생이 8월 24일 0시 1분을 기해 구입한 제1호 윈도 95를 시작으로 디지털 지구촌은 윈도 물결로 요동치게 된다.
지구가 자전을 거듭하면서, 자정을 넘긴 영어권 국가 대도시들의 PC 마니아들은 한결같이 윈도 95의 마법에 이끌려 컴퓨터 매장으로 달려나갔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 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면을 뒤덮은 윈도 95 로고로 장식된 대형 배너는 자정을 넘기면서 윈도 95의 공식 테마곡인 롤링 스톤즈의 '스타트 미 업(Start Me Up)'을 내보내 빌 게이츠가 제공하는 '미래로 가는 길'에 동참하려는 PC 마니아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렇게 윈도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는 전세계적 신드롬으로 널리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D-데이였던 8월 24일의 태양은 빌 게이츠를 위해 떠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S사의 본사가 위치한 워싱턴 주 레드먼드 시의 야외 캠퍼스에는 아카데미 시상식도 훌륭히 치를 수 있는 규모의 초대형 야전 텐트가 15개가 설치되는 등 지상 최대의 컴퓨터 관련 축제의 축포를 터뜨릴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2,500명이 넘는 취재진과 PC 관련 산업의 게스트들도 윈도 95가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킬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 최고의 인기 토크쇼 사회자인 제이 레노(Jay Leno)가 이 날 자축연의 사회자로 깜짝 출연하면서 전세계 매스컴들은 MS사의 윈도 95 출시 기념 파티를 마치 월드컵 결승전을 중계하듯이 특종으로 위성 중계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윈도 95의 출시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진풍경을 20년 남짓한 PC 역사상 최고의 대사건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사실 1995년 8월 중순부터 불기 시작한 윈도 95의 열풍은 하나의 상품 출시를 놓고 일어난 해프닝치고는 산업혁명으로 비롯된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들을 세워나갔다. "95번을 깔아야 제대로 깔린다"라는 일부 사용자들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윈도 95는 데뷔와 함께 소프트웨어 시장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면서 출시 6개월만에 2,000만 개라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빌 게이츠의 부와 명예는 세상에 뿌려진 윈도만큼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으며, 이제 PC 산업의 모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이란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엔 빠짐없이 MS사와 빌 게이츠가 언급되고 있다. 1975년 여름, 불과 19세의 나이로 창녀들이 득실거리는 뉴멕시코주 알버커키 시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간판을 올린 지 정확히 20년 만에 윌리엄 게이츠 3세는 PC 시장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왕좌에 등극하게 되었으며, 40세 생일을 두 달 앞둔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물이라는 또 하나의 칭호를 얻게 된다.
전 세계의 PC 사용자들과 행사장에 초청된 대부분의 PC 산업 관련 게스트들이 윈도 95의 대성공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그러나 빌 게이츠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휘말리게 된다. 출시 예정일을 2년이나 넘긴 윈도 95의 뒤늦은 출시는 빌 게이츠와 MS사가 염두에 두고 있던 프로젝트들 대부분의 불가피한 연기를 의미했다. 빌 게이츠 자신이 정확히 15년 전 PC 운영체제의 표준을 정립하면서 단 한 번의 시련 없이 오늘의 영광을 일구어낸 전례를 답습이라도 하듯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영국의 한 풋내기 프로그래머인 팀 버너스 리에 의해 개발된 HTML이라 불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는, 윈도 95의 모체인 시카고 프로젝트가 추진될 시점만 해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모자이크커뮤니케이션(Mosaic Communication)이라는 작은 회사에 의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전혀 생소한 영역을 일구어나가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 프로젝트를 시카고 프로젝트와 동시에 추진하기는 불가능했다는 현실적 논리와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의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과소 평가한 실수를 깨끗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PC 시장의 모든 거물 프로젝트들이 표준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주인공 역할을 놓쳐본 기억이 없는 MS사 입장에서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월드와이드웹 시장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인터넷이란 미디엄(medium)의 중요성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진 것이 전혀 없었다. 90년대 초, 대부분의 유닉스 기반 사용자들이 TCP/IP라는 공용 프로토콜을 설립하여 인터넷 정보의 흐름에 대한 표준을 설정할 때, MS사의 애플리케이션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스티브 발머는 TCP/IP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 분야를 이끌어온 삼두마차인 아메리카온라인(AOL), 컴퓨서브(CompuServe) 그리고 프로디지(Prodigy)의 아성에 철퇴를 가할 것을 은근히 기대해 온 마이크로소프트 네트워크(MSN) 프로젝트의 침몰은 MS사를 인터넷의 중심 궤도에서 완전히 탈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 법무성의 삼엄한 독과점 규제에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윈도 95 패키지 안에 포함시킨 MSN 서비스가 윈도 95로 업그레이드하는 상당수의 사용자들이 선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싸늘하게 외면당함으로써 빌 게이츠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MS사의 인터넷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빌 게이츠는 또 다른 추격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빌 게이츠가 인터넷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대륙의 개척을 놓고 펼치게 될 이 새로운 한 판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물량 싸움을 이루어 온 과거의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빌 게이츠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전혀 없는 게릴라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윈도 95와 함께 뚜껑이 열린 이 판도라의 상자는 빌 게이츠의 예상을 완전히 초월해 가면서 미래로 가는 진정한 길을 보여주었다.
빌 게이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난 5월 극비리에 수석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돌린 '인터넷 물결(Internet Tidal Wave)'이란 제목의 메모를 MS사가 앞으로 추진하게 될 프로젝트들 가운데 최고의 우선 순위로 선정하면서, 인터넷이라 불리는 정글에 익스플로러(Explorer)라는 신무기를 투입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Episode 27. 실리콘 밸리의 터미네이터
지난 1월부터 진행된 '실리콘 밸리 스토리'의 제1부 에피소드들에는 빌 게이츠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많은 독자들이 분명 PC 산업의 절반 이상으로 성장한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기적적 성공담이 빠져버린 것을 의아해 할 것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빌 게이츠는 실리콘 밸리의 인물이 아니며,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성장한 실리콘 밸리의 지도상에는 빌 게이츠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정확히 25년 전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는 물론 캘리포니아 주에 조차 한 번도 연고를 두지 않고 지금까지 사업을 추진한 매우 독특한 기업이다. 사실 실리콘 밸리에 적을 두지 않고 PC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부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IBM사를 선두로, 한 때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미치 카포의 로터스사도 보스턴의 '루트 128'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으며, 현재 네트워크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노벨사 또한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Salt Lake) 시에 기반을 둔 회사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아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나 모토롤라사 역시 서부 지역과는 무관하게 성장했지만 실리콘 밸리의 팽창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의 성공담은 시작부터 실리콘 밸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들의 성장 과정은 지리적 위치의 차이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밸리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해왔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앞에서 언급한 아웃사이더 기업들 중의 하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PC 시장을 언급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명사처럼 부각되어 버린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담은 분명 실리콘 밸리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많은 사건들의 주인공이지만, 애석하게도 실리콘 밸리의 터줏대감들인 디지털리서치사, 애플사, 휴렛팩커드사, 썬마이크로시스템사, 그리고 실리콘그래픽사사는 빌 게이츠의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PC 시장에서 가장 운이 놓은 남자, 소프트웨어 시장을 실리콘 밸리에서 도려내 간 장본인, 밸리의 낭만주의자들을 매몰차게 몰아낸 현실주의자, 그리고 윈텔이라는 제국주의로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을 종속 관계로 탈바꿈시킨 혁명주의자 등이 실리콘 밸리가 빌 게이츠에게 부여한 여러 수식어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실리콘 밸리에 '윈텔'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했으며, 그들이 일구어낸 거대한 제국은 실리콘 밸리의 대부분의 기업들을 '안티-윈텔'이라는 새로운 연합 체제로 몰아버렸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위협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을 여러 각도에서 조율하고 있다.
무일푼으로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시에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를 선보인 에드 로버츠의 미츠사를 배신하면서 실리콘 밸리로 진입한 빌 게이츠는, 당시 PC 시장에서 운영체제의 표준을 설정한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를 교묘한 상술로 도용하여 'MS-DOS'라는 새로운 표준 설정으로 입지를 확보했다. 그 후 애플사 몰락 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로서 혹은 IBM사의 후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기업으로서, MS사는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태양계에 존재하는 별은 아니지만 이 곳에서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는 모든 위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소 공급책 역할을 하는 공룡 기업으로 자라났다.
제2부인 '윈텔과 안티-윈텔'은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의 신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앞으로 3개월에 걸쳐 진행될 윈텔의 성공담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텔사의 성공담인 동시에 실리콘 밸리의 많은 천재들을 좌절시킨 비극적 사건들로서, 필자는 애플사의 매킨토시 라이선싱 비화를 시작으로 게리 킬달과의 DOS 분쟁, 그리고 IBM사와의 줄다리기를 마지막으로 윈텔과 안티-윈텔의 성장 과정을 가감없이 기술해 보려고 한다.
Episode 28. 적진에서 날아든 한 통의 편지
잡스와 스컬리의 당쟁 파동이 극에 달한 1985년, 애플사는 잡스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으로 유례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며,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존 스컬리와 그의 영원한 2인자 장 루이 가세는 애플사의 모든 정책을 좌우할 수 잇는 독재 체제를 견고히 다지면서 쓰러져가는 애플사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무너진 잡스와 그를 따르던 엔지니어들은 애플사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객체 지향 테크놀로지의 핵으로 자라날 넥스트(NeXT)사라 불리는 그들만의 리그를 창출하기 위해 분주했으며, 애플사의 자금책을 담당하던 마이크 마큘라 또한 지난 1년간의 내분으로 잃어버린 시장을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치면서 포스트 스티브 시대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5년간 밸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가속도가 붙어 있었고, PC 시장의 유례없는 호황은 스컬리에게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보편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적어도 룩 앤 필(Look & Feel)로 일반 사용자들에게 알려진 매킨토시 운영체제와 강력한 연산 기능을 갖춘 모로톨라사의 68000 프로세서는, 적진으로 간주되던 MS사의 DOS와 인텔사의 X86 프로세서로 기반을 닦은 PC 클론 플랫폼보다 테크놀로지 면에서 족히 2~3년은 앞서가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에서의 1년은 거의 한 세대를 의미할 만큼 큰 것이며, 그만큼 당시 애플사의 테크놀로지는 PC 시장의 모든 분야에서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1985년 6월 25일, 존 스컬리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한 통의 비밀 문서를 받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문서를 보낸 이는 앞으로 처절하게 진행될 애플사의 몰락에서 주연을 담당하게 될 빌 게이츠였다. 애플사는 이 편지를 통해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결정함은 물론 '윈텔'과 '안티-윈텔'이라는 새로운 판짜기에 도화선 역할을 주도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애플사의 악령으로 둔갑하게 될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빌 게이츠의 비밀 편지가 존 스컬리의 책상 위에 도착한 1985년 6월 25일, 애플사는 정체되어 있던 매킨토시 판매 실적으로 과거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고 침몰해 가고 있었지만, 잡스와 워즈니악이 이끌던 애플 II 기종의 호황 시절에 기록한 애플사의 매출액은 한 때 인텔사와 MS사의 총 매출액을 합친 금액을 넘어섰으며,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스컬리가 이끄는 애플사는 여전히 IBM사와 HP사를 제외한 모든 PC 기업들 중 부동의 정상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애플사의 눈에 비친 빌 게이츠는 작은 중소기업을 힘들게 이끌어가는 수완 좋은 경영자에 불과했으며,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나 엔지니어적 능력은 밸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준은 못 되었다.
GUI라 불리는 새로운 메타포를 전제로 하드웨어 아키텍처에서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까지 하나의 통합된 플랫폼으로 제작된 꿈의 PC인 매킨토시는 모든 면에서 PC 테크놀로지의 상징이었다. 그런만큼 애플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앞으로 진행될 PC 시장의 표준 정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데엔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매킨토시는 80년대 중반 실리콘 밸리가 일구어낸 최대의 상품이었고, 애플사가 이 골든 차일드를 어떻게 성장시키느냐에 따라 밸리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간주되고 있었다. 애플사는 밸리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와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정상의 기업이었고, 매킨토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중소기업들은 애플 타운 쿠퍼티노의 밴들리 빌딩 주변을 맴돌면서 팽창해가는 PC 시장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되는 떡고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PC 클론 시장의 운영체제 표준으로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 카포의 로터스 1-2-3의 출현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의 제1인자 자리를 빼앗긴 MS사의 빌 게이츠에게도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영부영 내어준 왕좌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난제였다. 당시 빌 게이츠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면 대결이 아닌 막강한 애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군주 국가로서 생존하는 사대주의 전략 뿐이었다. 즉,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이끌어냄으로써 MS사의 사업 기반을 PC 클론과 매킨토시라는 양대 진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운영체제보다는 애플리케이션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데 전력투구한다는 것이 그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것이 80년대 중반 빌 게이츠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빌 게이츠의 편지는 애플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직 애플사에서조차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는 맥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를 뜬금없이 제3의 인물이 나타나 감 놔라 떡 놔라 하는 것이 애플사 측에서는 사뭇 황당한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애플사의 엔지니어들을 제외한다면, 지구상에서 매킨토시라는 컴퓨터를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였으며, 빌 게이츠가 당시 직면한 매킨토시의 표준화 실패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몰락과도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1984년 매킨토시가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직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맥 전용 그래픽, 스프레드시트,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애플리케이션을 공급하기로 비밀리에 계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로터스 1-2-3의 출현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의 군주 자리를 풋내기 미치 카포에게 빼앗긴 빌 게이츠의 상처받은 자존심 또한 매킨토시 시장을 우선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그의 의지를 존 스컬리 이상으로 부풀려놓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로터스 1-2-3의 출현은 애플리케이션 분야의 선두를 고수하고 있던 MS사의 베스트셀러 스프레드시트, 멀티플랜(Multiplan)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빌 게이츠가 운영체제인 MS-DOS의 로열티로 벌어들이는 금액 역시 미치 카포가 로터스 1-2-3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판매해 벌어들이는 금액과는 천문학적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로터스 1-2-3와 MS-DOS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빌 게이츠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킨토시 플랫폼에 그의 비밀 병기인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우선적으로 선보이게 될 샌드(SAND)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만들었다.
초창기 DOS 플랫폼에 적용시키기 위해 추진된 MS사의 샌드 프로젝트는 매킨토시의 출현 이후 GUI 플랫폼으로 전환되어 MS사의 프로그래머들의 절반을 투입해 진행된 MS사 최대의 프로젝트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으며, 매킨토시의 상업적 성공은 빌 게이츠가 미치 카포의 독주에 제동을 걸 유일한 방안으로 간주되었다. 엑셀이라는 스프레드시트의 모체가 될 샌드 프로젝트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매킨토시의 상업적 성공이 전제되어야만 했고, 급기야 빌 게이츠는 자신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스티브 잡스가 전선에서 물러나 틈을 이용해 순진한 존 스컬리와 돈 키호테 장 루이 가세를 설득하기 위해 비밀 문서를 발송하기에 이른 것이다.
Episode 29. 매킨토시에 대한 빌 게이츠의 견해
빌 게이츠의 편지는 애플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일부 엔지니어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거론되던 맥 운영체제의 라이선스 이슈가 애플사는 물론 실리콘 밸리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며, 애플사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회사 창립 후 처음으로 두 명의 스티브를 완전히 배제한 체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의 쌍두마차 체제를 실리콘 빌리에 공고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1985년 6월 불어닥친 매킨토시 라이선스 이슈는 회장직을 맡고 있던 스티브 잡스를 같은 해 9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를 떠날 때까지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제외시키면서 1998년 아이맥으로 컴백하기 이전까지 그를 실리콘 밸리의 아웃사이더로 전락시키고 만다. 빌 게이츠가 개인적으로 보낸 이 비밀 문서는 "애플사는 PC 시장의 테크놀로지를 주도하는 부동의 선두주자이며, 애플사의 매킨토시는 PC 시장의 표준을 반드시 탑재해야 된다"라는 호소체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었다. 아울러 애플사가 모든 면에서 PC 시장을 주도해 나갈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잇다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PC 시장의 표준화 설정은 IBM사조차도 자력으로 단행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요소를 갖춘 이슈로서, 앞으로 정착될 GUI 운영체제 표준 설정 과정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애플사가 현실적으로 맥 운영체제를 라이선스하는 것이 PC 시장과 자사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애플사의 자력 회생에 관한 쟁점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었다. 즉, 매킨토시가 애플사의 독과점 정책으로는 PC 시장의 표준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 IBM사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의 라이선스화로 짧은 시간에 전세계의 중소 PC 관련 업체로 하여금 PC 클론의 미비한 구석구석을 보완하게 하여, 가장 안정적인 PC 플랫폼으로 정착하게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현재 PC 클론 플랫폼은 매킨토시보다 100배가 넘는 기업들과 엔지니어들이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으며, 단기간 내에 매킨토시의 운영체제가 PC 플랫폼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반 PC 업체들에 라이선스되지 않는다면 애플사의 미래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빌 게이츠는 이 비밀 문서에 매킨토시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견해와 함께 애플사가 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라이선스 전개도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친절함을 보이는데, 그는 여기서 애플사가 독점으로 PC 시장의 표준을 설정할 수 없는 다섯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경쟁 부재의 매킨토시 시장은 '높은 가격'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두 가지 불합리한 요소로 인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외면을 당할 것이다.
둘째, 애플사의 독점 체제는 상대적으로 느린 성능을 지닌 매킨토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쟁력에 비해 지속적인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PC 클론 플랫폼의 향상 속도에 결코 해법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세째, 최근 일어나고 잇는 애플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애플사의 신뢰성은 물론 PC 시장에서 매킨토시 독과점의 장기적 성공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넷째, 현재 대기업을 상대로 한 애플사의 소규모 판매 전략은 규모면에서나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PC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잡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다섯째, 매킨토시 시장을 세계적으로 넓히기 위해서는 각 국가에서 신용을 인정받는 지역 PC 업체들의 매킨토시 공급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애플사의 독점 체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될 이 다섯가지 이유는 빌 게이츠가 개인적으로 왜 매킨토시 운영체제가 현 시점에서 IBM사의 PC 플랫폼처럼 라이선스화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한 것으로, 14년이 지난 지금 애플사가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이러한 자신의 의견과 더불어 애플사가 매킨토시의 라이선스를 제공해도 될 만한 기업들의 리스트도 함께 첨부하였는데, 이 때 거론된 기업들은 모두 MS사가 애플사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반응을 비밀리에 사전 조율한 후 거의 확답을 받아놓은 상태였다는 것이 이 문서가 일반에 알려지면서 흘러나온 지배적인 후문이다.
빌 게이츠가 추천한 기업들은 미 대륙, 유럽, 그리고 아시아 대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기업의 라이선스 문제를 접촉할 임원의 구체적인 이름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미 대륙은 AT&T사를 시작으로 디지털이큅먼트사,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 휴렛팩커드사, 제록스사, 코닥이스트만사, 그리고 모토롤라사까지 애플사의 기본 시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비경쟁 대상 기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유럽 시장은 시맨스사, 올리베티사, 그리고 필립스가가 적격이며, 아시아 대륙은 소니사가 매킨토시 클론을 가장 이상적으로 제작 판매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문서는 마지막 부분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PC 클론 플랫폼의 운영체제를 OEM 방식으로 배포하면서 최고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며, 애플사가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OEM화를 결정할 경우 필요한 모든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담고 있어, 말 그대로 준 사업 계획서 이상의 의미를 담은 문서라고 할 만하다.
빌 게이츠는 시간이 없었다. 누구의 잣대로 해석해도 애플사의 매킨토시는 PC 클론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우수한 테크놀로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빌 게이츠는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조만간 단행될 라이선스에 MS사가 배제되어서는 결콘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이 비밀 문서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실리콘 밸리의 폭풍의 눈으로 자라난 애플사의 GUI 테크놀로지는 모든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어떤 기업도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애플사의 D-데이가 언제냐는 것인데,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애플사의 라이선스 이슈를 백지화시키면서 외로운 오디세이의 항해에 닻을 올리고 만다. 그러나 존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는 자신들의 고립화 정책이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가를 것이라는 예측보다는 지속적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는 애플사의 매출액을 상승시키기 위한 묘책에만 모든 열정을 바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14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혁명의 주도적 위치에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바라본 스컬리와 가세의 실책은 실리콘 밸리의 운명을 가르면서 윈텔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탄생시켰으며, 그들은 팽창의 속도가 날로 가속화되어 가는 밸리에 또 하나의 철칙을 선사하고 말았다.
"쏠 수 있는 총알은 단 한 방이며, 표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진다."
Episode 30. 그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고기를 낚으려 한 사나이
즉각적인 반응을 예상하면 보낸 빌 게이츠의 프로포즈에 대한 애플사의 반응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한동한 묵묵부답으로 일관되었다. 라이선싱 쟁점의 궁극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던 스컬리와 가세는 밸리의 대세를 무시한 채 소극적인 자세로 돌변했고, 기다리다 지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일급 참모인 제프 레익스(Jeff Raikes)의 조언을 강구하게 된다.
사실 애플사로 발송된 비밀 편지의 원본 작성자는 빌 게이츠가 아닌, 80년대 초반 애플사에서 망명한 레익스라는 매니저로서, 빌 게이츠는 그의 아이디어에 애플사가 접촉할 만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발송한 것에 불과했다. 레익스는 잡스와 같이 20대의 젊은 나이로 애플사의 엔지니어 팀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잡스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는 신예 참모였지만, 그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합류해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애플사와의 인연을 정리하였다. 레익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로 망명하여 훗날 윈텔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게 될 빌 게이츠의 '아홉 기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스티브 잡스는 레익스가 빌 게이츠 진영으로 옮겨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조만간 부도가 날 기업이다."
스티브 잡스가 어떤 근거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레익스를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합류시키려는 설득 작업을 했는지는 몰라도, 레익스란 인물은 애플사에선 몇 안 되는 미래 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는 MS-DOS가 PC 클론 시장의 표준을 설정할 무렵, 실리콘 밸리의 대세는 더 이상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확신을 내렸으며, 80년대 초반 그 누구보다 일찌감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가능성을 감지했다. 레익스가 떠날 때 잡스가 던진 이 한마디는 빌 게이츠에게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됐으며, 어쩌면 스티브 잡스는 무의식중에 던진 이 한마디처럼 80년대 중반 오픈 매킨토시 정책을 추진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잡스는 더 이상 애플사의 지휘관이 아니었으며, 애플사는 펩시맨 존 스컬리와 매킨토시 테크놀로지를 마치 종교처럼 숭배하는 가세에 의해 좌우되는 지극히 평범한 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보낸 제안데 대한 애플사의 공식 반응이 늦어지자 존 스컬리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빌 게이츠가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를 독촉하기 위해 건 이 한 통의 전화는 앞으로 전개될 애플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처절했다. 전화를 받은 스컬리는 빌 게이츠에게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이 없다고 단언함은 물론, 오히려 빌 게이츠에게 어떤 식으로 라이선스가 단행되어야 하는지 되물을 정도로 PC 시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게 약"이란 옛말이 있듯이 스컬리는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에 대한 구체적인 사전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된다.
문제는 장 루이 가세에게 있었다. 그는 애플사의 엔지니어 분야를 총괄적으로 감독하는 임원으로서 목숨을 걸고 매킨토시의 폐쇄성을 끝까지 고수하고 만다. 가세는 애플사의 NIH(Not Invented Here)주의인 "여기서 발명되지 않았으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애플식 사고를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주입시킨 주인공이었으며, 매킨토시를 단순한 컴퓨터가 아닌 종교적 의미로까지 받아들이려 한 극단주의자였다. 그는 스컬리의 제인에 따라 댄 아일러(Dan Eiler)라는 마케팅 매니저에 의해 진행된 '매킨토시의 라이선스화'란 주제의 브리핑에서 단호히 매킨토시의 독과점을 부르짖었다.
아일러에 의해 진행된 매킨토시 라이선스화의 요지는 간단했다. 현재 대세로 굳어지고 잇는 MS사의 도스 플랫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PC 클론 플랫폼에 적용시키는 방법뿐이라는 사뭇 극단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석상에서 장 루이 가세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아일러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한심한 발상이라며 일축해 버리고 만다.
장 루이 가세가 매킨토시의 독과점을 부르짖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매킨토시라는 컴퓨터는 PC 클론과 달리 설계 과정에서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미세한 조화를 이루며 제작된 컴퓨터로서,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따로 떼어내어 PC 클론에 접목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혈액형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둘째, 매킨토시로 애플사가 한 해 올리는 매출액은 20억 달러로 70만 대를 판매할 수 있는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지만, 라이선스가 단행되어 PC 클론 시장의 연 판매 대수인 400만 대에 탑재될 PC 전용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로열티를 100달러로 추정한다 해도 4억 달러의 매출액에 지나지 않으며, 이 순간 매킨토시 하드웨어의 시장은 붕괴된다는 결론이었다.
돌이켜보면, 장 루이 가세의 주장은 실로 한심한 발상이었을지는 몰라도 당시 애플사의 임원들은 가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애플사의 직원들은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매킨토시에 대한 엘리트 의식이 팽배해 있었고, 매킨토시를 PC 클론과 비교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가세가 주장하는 애플 차별주의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가 감히 매킨토시를 난잡한 PC 클론과 비교한단 말인가? 가세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뻗어나간 애플 프라이드 슬로건은 라이선스 분쟁을 일단락지음과 동시에 애플사가 밸리의 중원을 호령하는 대표 기업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요인이 되고 만다.
가세가 주장한 매킨토시의 독점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윈도 95가 출시되면서 수면 밑으로 침몰하는 애플호를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가세는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미국의 한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신의 판단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 졸속 처사였음을 깨끗이 인정하면서, 실리콘 밸리가 이렇게 거대한 디지털 문명을 만들어놓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애플사의 몰락에 자신의 과오가 일차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장 루이 가세는 실로 돈 키호테적인 인물이다. 1985년 모든 가능성을 일축하며 오픈 매킨토시 정책에 쇄기를 받은 장 루이 가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픈 맥(OPEN MAC)이라는 자동차 번호판을 달고 실리콘 밸리를 휘젓고 다녔으며, 맥 포터블(Mac Portable)의 참패로 애플사를 이탈한 후 그가 창립한 비(Be)OS사는 인텔 프로세서 플랫폼에 보란 듯이 매킨토시와 매우 흡사한 운영체제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장 루이 가세는 그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고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은, 실리콘 밸리가 창출한 세기의 낭만주의자이며, 아직도 억센 프렌치 악센트로 대화를 구사하는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돈 키호테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