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1.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 '알테어'
1974년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는 역사적인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알리게 된다. 8080 프로세서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란 보통 사람들과는 무관한 단어였다. 누가 감히 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그러나 미츠(MITS)사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8080 프로세서는 기존의 반도체 상품에 비해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기존의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로직 칩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사용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품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반도체는 판매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8080 프로세서는 엔드 유저에게 무한대의 응용성을 제공했고, 사용자들은 단시일 내에 컴퓨터 주변기기와 애플리케이션, 즉 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갔고, 컴퓨터는 이제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로서 스스로 자생력을 확보해 가고 있었다. 1975년도에 선보인 미츠사의 알테어는 조립식 제품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나사로 끼워 맞추거나 조립하는 수준이 아니라 용접까지 해야하고, 조립 후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기 위해선 사용자들이 기계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고난이도의 조립이었다. 왜 알테어 사가 컴퓨터를 전혀 접해본 경험이 없는 사용자들에게 이런 고차원의 조립을 강요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정보가 없다. 어쨌든 알테어라는 하드웨어의 등장은 곧 운영체제에서 응용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프트웨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볶은 김치보다 김치가 우선이듯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보다 우선적으로 존재해왔다. 노이스가 김치를 제공했고, 이 김치를 가장 간단히 볶을 수 있는 '베이식'이라는 볶은 김치는 빌 게이츠에 의해 탄생된다. 1975년 1월 하버드 대학 2년생이었던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The Popular Electronics>라는 잡지에 소개된 알테어 8800 컴퓨터를 보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려라!"라는 신의 계시를 받게 되는데, 이때 빌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사용하지 않고 하버드대의 컴퓨터 랩에서 PDP-10이라는 미니 컴퓨터를 활용하여 알테어 컴퓨터에 작동될 베이식 언어를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PDP-10 미니 컴퓨터의 에뮬레이터로 제작한 빌 게이츠 버전의 베이식 언어는 알테어 8800 컴퓨터에 직접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서 빌 게이츠는 취미 위주로 프로그래밍을 짜던 일반 마니아들과는 달리 사업가적인 자질을 보인다.
즉, 직접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도시에 위치한 미츠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직접 베이식 언어의 작동 여부를 진단하게 된다. 빌 게이츠의 베이식은 알테어 컴퓨터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미츠사의 사장인 에드 로버츠는 이 언어를 미츠 베이식이라는 이름으로 차후 알테어 컴퓨터에 번들로 판매하게 된다. 빌 게이츠는 미츠사 근처에 폴 앨런과 함께 애프터서비스 차원의 사무실을 차리게 되고, 학교를 자퇴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곳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간판을 올리게 되었으며, 빌 게이츠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PC 시장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한때 미츠사의 베이식 언어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시비에 말려들기도 했으나, 빌 게이츠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면서, 궁극적인 자신의 꿈이었던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 컴퓨터를 보급한다"는 슬로건을 서서히 현실화시킨다.
Episode 12. 70년대의 윌리엄 쇼클리 '게리 킬달'
하드웨어 시장에 윌리엄 쇼클리와 로버트 노이스가 있다면, 소프트웨어 시장에는 게리 킬달(Gary Kildall)과 윌리엄 게이츠가 있다. 쇼클리와 게리 킬달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쇼클리가 반도체 산업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아웃사이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듯이, 게리 킬달로 최초의 운영체제인 CP/M(Control Program/Monitor)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후 상업화에 성공하지만, 소프트웨어 산업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도중하차하게 된다.
쇼클리가 야심은 있었지만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8인의 배신자들'에게 하드웨어 시장을 내주었다면, 킬달은 너무 야심이 없었기에 빌 게이츠에게 왕좌를 내준 비운의 주인공이다. 게리 킬달은 군 장교들에게 컴파일러 체계에 대한 강의를 전담하면서 PC 운영체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시 인텔은 8080 프로세서를 시장에 선보이면서 메인프레임 시스템과 미니 컴퓨터 시스템을 에뮬레이트 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인텔과 인연을 맺은 게리 킬달은 DEC 사의 시스템을 8080 프로세서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에뮬레이터를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CP/M이라 불리는 최초의 PC 전용 운영체제를 구상하게 된다.
사실 인텔사가 킬달에게 의뢰한 에뮬레이터는 PC용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렵 IBM사가 FDD(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개발하게 되면서 킬달의 작업은 운영체제를 만드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되었고, 마침내 킬달은 DEC사의 PDP-10 미니컴퓨터의 TOPS-10 운영체제를 모방하여 어떤 8080 프로세서의 플랫폼에서도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는 CP/M 운영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게리 킬달이 CP/M 운영체제를 거의 완성시켜 갈 무렵, PC 시장은 보다 싸게 컴퓨터를 제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임사이(Imsai)라는 PC 제조업체는 IBM사가 개발한 FDD를 주변기기로 판매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운영체제를 제공하겠다고 사용자들에게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운영체제는 킬달의 CP/M 뿐이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PC 제조업체들이 CP/M을 요구함에 따라 마침내 킬달 혼자서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제조업체가 인텔의 8080 프로세서를 내장한 컴퓨터를 제작하면, 킬달은 그 제조회사에서 적용시킨 각종 입/출력 장치들에게 호환성을 부여해야만 했는데, 이 작업은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는 매우 지루한 코딩작업이었다. 게다가 킬달은 프로그램을 짜면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면 다시는 이러한 문제점이 일어나지 않도록 완벽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프로페셔널 프로그래머 타입이었다.
킬달은 CP/M 운영체제에 대한 넘치는 수요와 지루한 코딩 작업을 근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에 포함되어 있던 입출력과 주변기기의 컨트롤러들을 통제하는 부분을 바이오스(BIOS:Basic Input / Output System)란 이름으로 분리시켰다. 이로써 새로운 업체가 8080 프로세서로 컴퓨터를 제작하면, 바이오스만 재수정하여 CP/M을 적용시키는 매우 효율적인 방안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해나갈 수 있었다. 그는 CP/M 운영체제라는 상품 하나로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그가 설립한 디지털 리서치 사는 IBM PC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도스가 탄생하기 전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게리 킬달은 이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더 이상 운영체제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의 물욕도 없었다. 만약 그가 빌 게이츠처럼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면,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최초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운영체제와 바이오스를 개발한 업적을 남긴 후 실리콘 밸리의 팽창하는 과정에서 도중하차한다.
Episode 13. 홈스테드 고교의 '두 스티브'에 의해 애플 컴퓨터 탄생하다.
60년대 후반 인텔사의 천재적인 엔지니어들에 의해 탄생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칩(DRAM)은 70년대 중반 퍼스널 컴퓨터(PC)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킨다. 데스크톱 컴퓨터의 출현은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즉, 세상의 모든 계량 상품들을 아날로그라는 수동적 미디엄에서 디지털이라는 능동적인 미디엄으로 바꾸어 놓는 대혁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디지털 혁명에 불을 지핀 미츠사(MITS)의 알테어 8800은 퍼스널 컴퓨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알테어 8800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게리 킬달의 운영체제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기계어를 이해할 수 있고 용접 능력을 갖춘 소수의 컴퓨터 취미가들에게 그들만의 유토피아 세상을 열어주었지만, 소위 엔드 유저라 불리는 보통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PC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컴퓨터 본체,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마우스 등을 두루 갖춘 퍼스널 컴퓨터는, 노이스의 인텔사도 빌 게이츠의 MS사도 아닌, 홈스테드 고교의 스티브 워즈니악(Wozniak)과 스티브 잡스(Jobs)라는 두 명의 '스티브'에 의해 탄생했다.
HP사와 인텔사에 이어 디지털 문명의 세 번째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은 애플사이다. HP사와 인텔사의 주도하에 나날이 팽창하는 실리콘 밸리의 산업 구조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의 숙제는 알테어를 타자기처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PC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워즈(Woz)란 애칭을 지닌 스티브 워즈니악이 마침내 그 숙제를 멋지게 풀어낸 것이다. 워즈는 디자인에서부터 최종 조립과정에 이르기까지 혼자 힘으로 '애플 I'이라는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어냈고, 20년 전 고안해낸 애플 I의 하드웨어 구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의 PC의 구조에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애플 I 프로젝트는 워즈니악의 순수한 취미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컴퓨터 관련 학문의 체계가 전무했던 그 시절, 한 평범한 고등학생의 개인적인 집착에서 출발한 퍼스널 컴퓨터에 대한 메타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비즈니스맨은 존재하지 않았다. 워즈니악은 대학 생활을 잠시 접고, 팔로알토로 돌아와 HP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할 당시, 애플 I 컴퓨터의 서킷 디자인을 HP사의 엔지니어들에게 보여주며, 나름대로 자문을 구했지만, 애석하게도 HP 엔지니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워즈니악은 독자적으로 애플 I을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때 HP사의 엔지니어들이 워즈니악의 디자인을 좀더 신중히 검토했거나, 워즈니악이 좀더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오늘날의 애플사는 HP사의 계열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홈스테드 교교시절 수십 종의 퍼스널 컴퓨터를 디자인한 바 있는 워즈니악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재학 시절,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Homebrew Computer Club)'에서 고등학교 5년 후배인 또 다른 스티브 잡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이들의 환성 콤비 플레이는 애플 I이라는 역사적인 컴퓨터를 탄생시킨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서로 단점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이 둘이 손을 합치면 불가능이란 없었다. 워즈니악은 자신의 엔지니어적인 숨은 능력을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의 친구들에게 뽐내기 위해 애플 I 컴퓨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고, 잡스는 바로 워즈니악의 애플 I 프로토 타입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의 컴퓨터가 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잡스는 사업가적 기질이 있었고, 워즈니악은 천재적인 컴퓨터 디자이닝 능력이 있었다. 모든 실리콘 상품이 귀하고 비쌌던 70년대 후반, 애플 I 컴퓨터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속품들을 조달하는 업무는 잡스의 몫이었고, 이 부품들을 컴퓨터에 접목시키는 엔지니어적인 작업은 워즈니악의 것이었다. 만약 워즈니악이 애플 I 프로젝트에 랜덤 액세스 메모리칩을 적용하고 싶다는 말을 어렵사리 꺼내면, 잡스는 틀림없이 그 이튿날 워즈니악에게 현물을 조달해 주었다.
워즈니악은 엔드 유저를 위한 초소형 컴퓨터를 원했고, 그가 탄생시킨 애플 I은 킷트 상품이었던 미츠사나 임사이사의 컴퓨터보다 훨씬 작고 획기적이었다. 즉 8KB의 메모리를 탑재했는데, 워즈니악이 직접 작성한 애플 베이식이 4KB의 메모리를 요구했고, 나머지 4K를 활용해 사용자들이 베이식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었다. 또 키보드와 모니터를 장착할 수 있었다.
워즈니악은 곧바로 잡스의 로스가토스 차고로 달려가 주먹구구식으로 200대의 애플 I을 제작하게 되고, 이들은 일년 내에 홈브루 컴퓨터와 잡스의 인맥을 통해 모조리 팔아치우는데 성공한다. 애플 I의 상업적인 성공에 고무된 잡스는 워즈니악을 설득하여 자동차를 포함한 그들의 전 재산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게 되고, 1976년 4월 1일의 만우절을 택해 역사적인 애플사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왜 워즈니악과 잡스는 그들의 컴퓨터와 회사명을 '애플(Apple)'이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設)이 있다. 워즈니악과 잡스가 프로토 타입을 완성한 후 가장 먹고 싶었던 과일이 애플이었다는 설에서부터, 아타리(Atari)사보다 전화번호부에 먼저 기재되기 위해 애플을 선택했다는 설까지 다양한데, 가장 정통으로 전해지는 것은 잡스와 워즈니악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비틀즈의 음반회사 명칭이 애플 레코드사였다는 것이다.
Episode 14.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낭만주의자,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I의 성공은 두 스티브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던졌다. 내성적인 성격의 워즈니악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자신감을 의미했고, 잡스에게는 돈을 의미했다. 워즈니악은 더욱 자신감을 얻어 엔드 유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업그레이드 모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워즈니악의 두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인 애플 II였다.
애플 II는 워즈니악이 평소 꿈꿔왔던 '살아있는 퍼스널 컴퓨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즉 초, 중, 고등학생들에겐 무한대의 게임과 각종 프로그래밍 유틸리티를 제공했고, 대학생과 기업인에게는 원시적이긴 했지만 비지칼크(VisiCalc)라 불리는 최초의 스프레드시트를 제공했으며, 컴퓨터 마니아들에게는 프로그래머라는 멋진 직업을 선사했다. 또 실리콘 밸리를 포함한 전세계의 PC 취미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애플 게임과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동호회와 컴퓨터 벼룩시장을 통해 교환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함에 따라, 애플 II는 출시된 지 일년도 안돼 PC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애플 II의 성공은 워즈니악과 잡스를 실리콘 밸리의 백만장자 반열에 올려놓았고, 애플은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포츈지 선정 500대 기업'으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그렇게 애플사를 화려하게 성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애플사의 초창기 신화는 워즈니악과 잡스의 듀오 플레이만은 아니었다. 그 둘의 뒤에는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라는 제3의 인물이 존재했다. 그는 인텔사에서 재정 담당책을 맡아온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실리콘 밸리 벤처 자금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벤처 펀드 메니저였다. 그는 인텔사의 설립 과정에서 형성된 노이스, 무어 그리고 아서 록의 3각 구도를 재현하듯, 워즈니악과 잡스의 프로토 타입의 상품화 과정에서 자금 담당 역할을 훌륭히 소화내 냈다. 그리고 잡스와 워즈니악이 80년대 중반 조직의 정치적인 분쟁으로 애플사를 이탈할 무렵, 쿠퍼티노 애플타운의 제1인자로 등극하게 된다(이들 3인방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애플사의 영광 뒤에 숨어있는 고뇌와 좌절은 차후에 소개할 제2부 윈텔과 안티-윈텔 편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어찌됐건 이들 3인방의 업적은 퍼스널 컴퓨터의 대중화를 의미했고, 이제 PC 시장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주변기기 시장의 3박자가 균형을 이루며 점차 세계적인 신드롬으로 확산되어 간다.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워즈니악은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애플사의 팽창과정에서 스스로 자유인으로 복귀를 선택했다. 누구도 컴퓨터를 혼자 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혼자의 힘으로 해냈고, 모든 엔지니어들이 합심해서 더욱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어 낼 때 그곳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워즈니악은, 현재 로스가토스시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평범한 도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황금사냥을 위해 밸리로 진출하는 무수한 엔지니어들과 벤처리스트들에게 워즈니악의 행보는 실리콘 밸리에 낭만주의와 로맨스를 가르쳐준다. 오늘날 애플사의 상징으로 굳어진 실험정신과 낭만주의는 워즈니악이 실리콘 밸리에 선사한 애플 컴퓨터보다 몇 배 소중한 선물이다.
Episode 15. 갈라지는 PC 시장, 애플 II와 IBM PC의 충돌
애플사는 퍼스널 컴퓨터 시장이 지각변동을 일으킬 때마다 항상 주연에서 조연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 본 기업이다. 윈도 95가 '애플 죽이기'의 속편이라면, IBM사의 'The PC'는 '애플 죽이기'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다.
IBM사의 The PC는 막대한 자본과 조직적인 전략에 힘입어 출시와 동시에 애플 컴퓨터를 제치고 컴퓨터 시작의 표준으로 군림하게 된다. IBM사는 확실히 PC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의 PC 업체들과는 사뭇 다른 기업이었다. 그 당시 뉴욕 본사 경영진들의 눈에 비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운영체제에 대한 소유권 문제는 중간 간부급에서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쟁점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뉴욕 본사의 경졍진들에게 비춰진 The PC는 거대제국이 일반 소비자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체면치레 상품에 불과할 뿐, 결코 매출액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던 것이다. 80년대 초 IBM사의 총 매출액은 PC 시장 전체 규모의 60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잡스는 오리지널 IBM PC가 출시되는 날, "Welcome IBM, Seriously..."라는 광고를 각종 매체를 통해 내보내며, 오늘날까지 생존을 위한 사투를 거듭하고 있다.
사실, IBM사의 출현은 애플을 포함한 대부분의 잔챙이 회사들에게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최악의 악몽인 아마겟돈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역사는 할리우드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고, The PC라 불리는 행성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존 PC 시장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 결과 PC 시장의 중소 군주로 군림했던 알테어, 임사이, 아타리, 코모도어, 라디오 샥, 탠디 등의 업체들은 흔적도 없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물론 애플 II도 The PC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고, 돌연변이로 살아남은 매킨토시는 '윈도 95'에 의해 코마 상태에 놓여 있지만, 애플사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늘날 컴퓨터 시장을 적어도 2원 구도로 갈라놓는 핵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윈텔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차후 형성될 안티-윈텔 연합체제의 뿌리 역할을 맡게 된다.
워즈니악의 애플 II와 IBM사의 The PC는 동 시대에 공존한 대표적인 퍼스널 컴퓨터이지만, 이들의 태생과정을 들여다보면 엄연히 종자가 틀리다. 애플 II는 워즈니악 개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서킷 디자인, 마이크로프로세서, 메모리칩, 그래픽 카드, 로컬 버스, 롬 베이식 등 애플 컴퓨터에 포함된 모든 기능들은 물론이고 조립까지도 혼자의 힘으로 완성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원맨쇼' 컴퓨터였다.
워즈니악은 애플 컴퓨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미래의 PC 시장을 궁극적으로 이원화시키게 되는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PC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선택이 그것이다. 그는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를 살 돈이 없어 그것의 5분의 1 가격이었던 MOS 테크놀로지를 도용한 모토롤라 6800 프로세서를 선택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애플은 지금까지도 모토롤라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그 때 워즈니악이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를 구입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면 The PC의 탄생은 무의미했을 것이며, 무어의 법칙도 다른 곡선을 그렸을 것이다.
한편 '애플 죽이기'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추진한 코드명 어콘(Acorn) 프로젝트는 1년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출발했다. IBM사가 맘만 먹으면 한 달 안에도 퍼스널 컴퓨터를 탄생시킬 능력이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하지만 그 당시 어콘 프로젝트는 슈퍼파워 IBM 제국이 국책사업으로 추진할 만한 알짜 프로젝트는 결코 아니었다. IBM사는 1년이라는 타임 테이블을 정해놓고, 플로리다주 보카(Boca)시의 지방 계열사에 어콘 프로젝트를 떠넘겼고,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빌 로웨(Lowe)는 다시 외부의 하청업체를 이용해 추진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IBM사의 조직 구조와 전례를 감안하면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로웨가 궁극적으로 외부 조달 방식을 택한 이유는 어콘 프로젝트가 자신의 출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뉴욕 본사의 경영진들의 관점에서는 고만고만한 프로젝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PC를 가장 손쉽게 상품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로웨의 결정은 앞으로 20년간 IBM사의 메인프레임과 중저급 미니 컴퓨터 사업의 몰락을 급속도로 앞당기는 전주곡이 되었으며, PC 시장의 클론화는 궁극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텔사의 윈텔 진영을 구축시키는 씨앗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결국 컴팩(Compaq), 델(Dell) 등 전세계의 PC 클론 회사들은 타이타닉 호 IBM을 침몰시키는 거대한 빙산으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빌 로웨에 의해 추진되고 돈 에스트리지(Don Estridge)에 의해 완성된 The PC라는 괴물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실리콘 밸리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대대적인 세대 교체를 실현한다.
1974년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는 역사적인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알리게 된다. 8080 프로세서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란 보통 사람들과는 무관한 단어였다. 누가 감히 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그러나 미츠(MITS)사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8080 프로세서는 기존의 반도체 상품에 비해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기존의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로직 칩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사용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품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반도체는 판매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8080 프로세서는 엔드 유저에게 무한대의 응용성을 제공했고, 사용자들은 단시일 내에 컴퓨터 주변기기와 애플리케이션, 즉 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갔고, 컴퓨터는 이제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로서 스스로 자생력을 확보해 가고 있었다. 1975년도에 선보인 미츠사의 알테어는 조립식 제품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나사로 끼워 맞추거나 조립하는 수준이 아니라 용접까지 해야하고, 조립 후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기 위해선 사용자들이 기계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고난이도의 조립이었다. 왜 알테어 사가 컴퓨터를 전혀 접해본 경험이 없는 사용자들에게 이런 고차원의 조립을 강요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정보가 없다. 어쨌든 알테어라는 하드웨어의 등장은 곧 운영체제에서 응용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프트웨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볶은 김치보다 김치가 우선이듯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보다 우선적으로 존재해왔다. 노이스가 김치를 제공했고, 이 김치를 가장 간단히 볶을 수 있는 '베이식'이라는 볶은 김치는 빌 게이츠에 의해 탄생된다. 1975년 1월 하버드 대학 2년생이었던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The Popular Electronics>라는 잡지에 소개된 알테어 8800 컴퓨터를 보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려라!"라는 신의 계시를 받게 되는데, 이때 빌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사용하지 않고 하버드대의 컴퓨터 랩에서 PDP-10이라는 미니 컴퓨터를 활용하여 알테어 컴퓨터에 작동될 베이식 언어를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PDP-10 미니 컴퓨터의 에뮬레이터로 제작한 빌 게이츠 버전의 베이식 언어는 알테어 8800 컴퓨터에 직접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서 빌 게이츠는 취미 위주로 프로그래밍을 짜던 일반 마니아들과는 달리 사업가적인 자질을 보인다.
즉, 직접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도시에 위치한 미츠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직접 베이식 언어의 작동 여부를 진단하게 된다. 빌 게이츠의 베이식은 알테어 컴퓨터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미츠사의 사장인 에드 로버츠는 이 언어를 미츠 베이식이라는 이름으로 차후 알테어 컴퓨터에 번들로 판매하게 된다. 빌 게이츠는 미츠사 근처에 폴 앨런과 함께 애프터서비스 차원의 사무실을 차리게 되고, 학교를 자퇴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곳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간판을 올리게 되었으며, 빌 게이츠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PC 시장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한때 미츠사의 베이식 언어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시비에 말려들기도 했으나, 빌 게이츠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면서, 궁극적인 자신의 꿈이었던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 컴퓨터를 보급한다"는 슬로건을 서서히 현실화시킨다.
Episode 12. 70년대의 윌리엄 쇼클리 '게리 킬달'
하드웨어 시장에 윌리엄 쇼클리와 로버트 노이스가 있다면, 소프트웨어 시장에는 게리 킬달(Gary Kildall)과 윌리엄 게이츠가 있다. 쇼클리와 게리 킬달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쇼클리가 반도체 산업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아웃사이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듯이, 게리 킬달로 최초의 운영체제인 CP/M(Control Program/Monitor)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후 상업화에 성공하지만, 소프트웨어 산업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도중하차하게 된다.
쇼클리가 야심은 있었지만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8인의 배신자들'에게 하드웨어 시장을 내주었다면, 킬달은 너무 야심이 없었기에 빌 게이츠에게 왕좌를 내준 비운의 주인공이다. 게리 킬달은 군 장교들에게 컴파일러 체계에 대한 강의를 전담하면서 PC 운영체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시 인텔은 8080 프로세서를 시장에 선보이면서 메인프레임 시스템과 미니 컴퓨터 시스템을 에뮬레이트 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인텔과 인연을 맺은 게리 킬달은 DEC 사의 시스템을 8080 프로세서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에뮬레이터를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CP/M이라 불리는 최초의 PC 전용 운영체제를 구상하게 된다.
사실 인텔사가 킬달에게 의뢰한 에뮬레이터는 PC용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렵 IBM사가 FDD(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개발하게 되면서 킬달의 작업은 운영체제를 만드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되었고, 마침내 킬달은 DEC사의 PDP-10 미니컴퓨터의 TOPS-10 운영체제를 모방하여 어떤 8080 프로세서의 플랫폼에서도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는 CP/M 운영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게리 킬달이 CP/M 운영체제를 거의 완성시켜 갈 무렵, PC 시장은 보다 싸게 컴퓨터를 제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임사이(Imsai)라는 PC 제조업체는 IBM사가 개발한 FDD를 주변기기로 판매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운영체제를 제공하겠다고 사용자들에게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운영체제는 킬달의 CP/M 뿐이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PC 제조업체들이 CP/M을 요구함에 따라 마침내 킬달 혼자서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제조업체가 인텔의 8080 프로세서를 내장한 컴퓨터를 제작하면, 킬달은 그 제조회사에서 적용시킨 각종 입/출력 장치들에게 호환성을 부여해야만 했는데, 이 작업은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는 매우 지루한 코딩작업이었다. 게다가 킬달은 프로그램을 짜면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면 다시는 이러한 문제점이 일어나지 않도록 완벽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프로페셔널 프로그래머 타입이었다.
킬달은 CP/M 운영체제에 대한 넘치는 수요와 지루한 코딩 작업을 근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에 포함되어 있던 입출력과 주변기기의 컨트롤러들을 통제하는 부분을 바이오스(BIOS:Basic Input / Output System)란 이름으로 분리시켰다. 이로써 새로운 업체가 8080 프로세서로 컴퓨터를 제작하면, 바이오스만 재수정하여 CP/M을 적용시키는 매우 효율적인 방안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해나갈 수 있었다. 그는 CP/M 운영체제라는 상품 하나로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그가 설립한 디지털 리서치 사는 IBM PC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도스가 탄생하기 전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게리 킬달은 이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더 이상 운영체제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의 물욕도 없었다. 만약 그가 빌 게이츠처럼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면,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최초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운영체제와 바이오스를 개발한 업적을 남긴 후 실리콘 밸리의 팽창하는 과정에서 도중하차한다.
Episode 13. 홈스테드 고교의 '두 스티브'에 의해 애플 컴퓨터 탄생하다.
60년대 후반 인텔사의 천재적인 엔지니어들에 의해 탄생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칩(DRAM)은 70년대 중반 퍼스널 컴퓨터(PC)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킨다. 데스크톱 컴퓨터의 출현은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즉, 세상의 모든 계량 상품들을 아날로그라는 수동적 미디엄에서 디지털이라는 능동적인 미디엄으로 바꾸어 놓는 대혁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디지털 혁명에 불을 지핀 미츠사(MITS)의 알테어 8800은 퍼스널 컴퓨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알테어 8800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게리 킬달의 운영체제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기계어를 이해할 수 있고 용접 능력을 갖춘 소수의 컴퓨터 취미가들에게 그들만의 유토피아 세상을 열어주었지만, 소위 엔드 유저라 불리는 보통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PC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컴퓨터 본체,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마우스 등을 두루 갖춘 퍼스널 컴퓨터는, 노이스의 인텔사도 빌 게이츠의 MS사도 아닌, 홈스테드 고교의 스티브 워즈니악(Wozniak)과 스티브 잡스(Jobs)라는 두 명의 '스티브'에 의해 탄생했다.
HP사와 인텔사에 이어 디지털 문명의 세 번째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은 애플사이다. HP사와 인텔사의 주도하에 나날이 팽창하는 실리콘 밸리의 산업 구조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들의 숙제는 알테어를 타자기처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PC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워즈(Woz)란 애칭을 지닌 스티브 워즈니악이 마침내 그 숙제를 멋지게 풀어낸 것이다. 워즈는 디자인에서부터 최종 조립과정에 이르기까지 혼자 힘으로 '애플 I'이라는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어냈고, 20년 전 고안해낸 애플 I의 하드웨어 구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의 PC의 구조에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애플 I 프로젝트는 워즈니악의 순수한 취미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컴퓨터 관련 학문의 체계가 전무했던 그 시절, 한 평범한 고등학생의 개인적인 집착에서 출발한 퍼스널 컴퓨터에 대한 메타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비즈니스맨은 존재하지 않았다. 워즈니악은 대학 생활을 잠시 접고, 팔로알토로 돌아와 HP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할 당시, 애플 I 컴퓨터의 서킷 디자인을 HP사의 엔지니어들에게 보여주며, 나름대로 자문을 구했지만, 애석하게도 HP 엔지니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워즈니악은 독자적으로 애플 I을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때 HP사의 엔지니어들이 워즈니악의 디자인을 좀더 신중히 검토했거나, 워즈니악이 좀더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오늘날의 애플사는 HP사의 계열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홈스테드 교교시절 수십 종의 퍼스널 컴퓨터를 디자인한 바 있는 워즈니악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재학 시절,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Homebrew Computer Club)'에서 고등학교 5년 후배인 또 다른 스티브 잡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이들의 환성 콤비 플레이는 애플 I이라는 역사적인 컴퓨터를 탄생시킨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서로 단점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이 둘이 손을 합치면 불가능이란 없었다. 워즈니악은 자신의 엔지니어적인 숨은 능력을 홈브루 컴퓨터 동호회의 친구들에게 뽐내기 위해 애플 I 컴퓨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고, 잡스는 바로 워즈니악의 애플 I 프로토 타입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의 컴퓨터가 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잡스는 사업가적 기질이 있었고, 워즈니악은 천재적인 컴퓨터 디자이닝 능력이 있었다. 모든 실리콘 상품이 귀하고 비쌌던 70년대 후반, 애플 I 컴퓨터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속품들을 조달하는 업무는 잡스의 몫이었고, 이 부품들을 컴퓨터에 접목시키는 엔지니어적인 작업은 워즈니악의 것이었다. 만약 워즈니악이 애플 I 프로젝트에 랜덤 액세스 메모리칩을 적용하고 싶다는 말을 어렵사리 꺼내면, 잡스는 틀림없이 그 이튿날 워즈니악에게 현물을 조달해 주었다.
워즈니악은 엔드 유저를 위한 초소형 컴퓨터를 원했고, 그가 탄생시킨 애플 I은 킷트 상품이었던 미츠사나 임사이사의 컴퓨터보다 훨씬 작고 획기적이었다. 즉 8KB의 메모리를 탑재했는데, 워즈니악이 직접 작성한 애플 베이식이 4KB의 메모리를 요구했고, 나머지 4K를 활용해 사용자들이 베이식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었다. 또 키보드와 모니터를 장착할 수 있었다.
워즈니악은 곧바로 잡스의 로스가토스 차고로 달려가 주먹구구식으로 200대의 애플 I을 제작하게 되고, 이들은 일년 내에 홈브루 컴퓨터와 잡스의 인맥을 통해 모조리 팔아치우는데 성공한다. 애플 I의 상업적인 성공에 고무된 잡스는 워즈니악을 설득하여 자동차를 포함한 그들의 전 재산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게 되고, 1976년 4월 1일의 만우절을 택해 역사적인 애플사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왜 워즈니악과 잡스는 그들의 컴퓨터와 회사명을 '애플(Apple)'이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設)이 있다. 워즈니악과 잡스가 프로토 타입을 완성한 후 가장 먹고 싶었던 과일이 애플이었다는 설에서부터, 아타리(Atari)사보다 전화번호부에 먼저 기재되기 위해 애플을 선택했다는 설까지 다양한데, 가장 정통으로 전해지는 것은 잡스와 워즈니악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비틀즈의 음반회사 명칭이 애플 레코드사였다는 것이다.
Episode 14.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낭만주의자,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I의 성공은 두 스티브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던졌다. 내성적인 성격의 워즈니악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자신감을 의미했고, 잡스에게는 돈을 의미했다. 워즈니악은 더욱 자신감을 얻어 엔드 유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업그레이드 모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워즈니악의 두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인 애플 II였다.
애플 II는 워즈니악이 평소 꿈꿔왔던 '살아있는 퍼스널 컴퓨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즉 초, 중, 고등학생들에겐 무한대의 게임과 각종 프로그래밍 유틸리티를 제공했고, 대학생과 기업인에게는 원시적이긴 했지만 비지칼크(VisiCalc)라 불리는 최초의 스프레드시트를 제공했으며, 컴퓨터 마니아들에게는 프로그래머라는 멋진 직업을 선사했다. 또 실리콘 밸리를 포함한 전세계의 PC 취미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애플 게임과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동호회와 컴퓨터 벼룩시장을 통해 교환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함에 따라, 애플 II는 출시된 지 일년도 안돼 PC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애플 II의 성공은 워즈니악과 잡스를 실리콘 밸리의 백만장자 반열에 올려놓았고, 애플은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포츈지 선정 500대 기업'으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그렇게 애플사를 화려하게 성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애플사의 초창기 신화는 워즈니악과 잡스의 듀오 플레이만은 아니었다. 그 둘의 뒤에는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라는 제3의 인물이 존재했다. 그는 인텔사에서 재정 담당책을 맡아온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실리콘 밸리 벤처 자금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벤처 펀드 메니저였다. 그는 인텔사의 설립 과정에서 형성된 노이스, 무어 그리고 아서 록의 3각 구도를 재현하듯, 워즈니악과 잡스의 프로토 타입의 상품화 과정에서 자금 담당 역할을 훌륭히 소화내 냈다. 그리고 잡스와 워즈니악이 80년대 중반 조직의 정치적인 분쟁으로 애플사를 이탈할 무렵, 쿠퍼티노 애플타운의 제1인자로 등극하게 된다(이들 3인방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애플사의 영광 뒤에 숨어있는 고뇌와 좌절은 차후에 소개할 제2부 윈텔과 안티-윈텔 편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어찌됐건 이들 3인방의 업적은 퍼스널 컴퓨터의 대중화를 의미했고, 이제 PC 시장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주변기기 시장의 3박자가 균형을 이루며 점차 세계적인 신드롬으로 확산되어 간다.
실리콘 밸리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워즈니악은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애플사의 팽창과정에서 스스로 자유인으로 복귀를 선택했다. 누구도 컴퓨터를 혼자 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혼자의 힘으로 해냈고, 모든 엔지니어들이 합심해서 더욱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어 낼 때 그곳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워즈니악은, 현재 로스가토스시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평범한 도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황금사냥을 위해 밸리로 진출하는 무수한 엔지니어들과 벤처리스트들에게 워즈니악의 행보는 실리콘 밸리에 낭만주의와 로맨스를 가르쳐준다. 오늘날 애플사의 상징으로 굳어진 실험정신과 낭만주의는 워즈니악이 실리콘 밸리에 선사한 애플 컴퓨터보다 몇 배 소중한 선물이다.
Episode 15. 갈라지는 PC 시장, 애플 II와 IBM PC의 충돌
애플사는 퍼스널 컴퓨터 시장이 지각변동을 일으킬 때마다 항상 주연에서 조연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 본 기업이다. 윈도 95가 '애플 죽이기'의 속편이라면, IBM사의 'The PC'는 '애플 죽이기'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다.
IBM사의 The PC는 막대한 자본과 조직적인 전략에 힘입어 출시와 동시에 애플 컴퓨터를 제치고 컴퓨터 시작의 표준으로 군림하게 된다. IBM사는 확실히 PC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의 PC 업체들과는 사뭇 다른 기업이었다. 그 당시 뉴욕 본사 경영진들의 눈에 비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운영체제에 대한 소유권 문제는 중간 간부급에서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쟁점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뉴욕 본사의 경졍진들에게 비춰진 The PC는 거대제국이 일반 소비자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체면치레 상품에 불과할 뿐, 결코 매출액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던 것이다. 80년대 초 IBM사의 총 매출액은 PC 시장 전체 규모의 60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잡스는 오리지널 IBM PC가 출시되는 날, "Welcome IBM, Seriously..."라는 광고를 각종 매체를 통해 내보내며, 오늘날까지 생존을 위한 사투를 거듭하고 있다.
사실, IBM사의 출현은 애플을 포함한 대부분의 잔챙이 회사들에게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최악의 악몽인 아마겟돈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역사는 할리우드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고, The PC라 불리는 행성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존 PC 시장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 결과 PC 시장의 중소 군주로 군림했던 알테어, 임사이, 아타리, 코모도어, 라디오 샥, 탠디 등의 업체들은 흔적도 없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물론 애플 II도 The PC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고, 돌연변이로 살아남은 매킨토시는 '윈도 95'에 의해 코마 상태에 놓여 있지만, 애플사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늘날 컴퓨터 시장을 적어도 2원 구도로 갈라놓는 핵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윈텔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차후 형성될 안티-윈텔 연합체제의 뿌리 역할을 맡게 된다.
워즈니악의 애플 II와 IBM사의 The PC는 동 시대에 공존한 대표적인 퍼스널 컴퓨터이지만, 이들의 태생과정을 들여다보면 엄연히 종자가 틀리다. 애플 II는 워즈니악 개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서킷 디자인, 마이크로프로세서, 메모리칩, 그래픽 카드, 로컬 버스, 롬 베이식 등 애플 컴퓨터에 포함된 모든 기능들은 물론이고 조립까지도 혼자의 힘으로 완성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원맨쇼' 컴퓨터였다.
워즈니악은 애플 컴퓨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미래의 PC 시장을 궁극적으로 이원화시키게 되는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PC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선택이 그것이다. 그는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를 살 돈이 없어 그것의 5분의 1 가격이었던 MOS 테크놀로지를 도용한 모토롤라 6800 프로세서를 선택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애플은 지금까지도 모토롤라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그 때 워즈니악이 인텔사의 8080 프로세서를 구입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면 The PC의 탄생은 무의미했을 것이며, 무어의 법칙도 다른 곡선을 그렸을 것이다.
한편 '애플 죽이기'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추진한 코드명 어콘(Acorn) 프로젝트는 1년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출발했다. IBM사가 맘만 먹으면 한 달 안에도 퍼스널 컴퓨터를 탄생시킬 능력이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하지만 그 당시 어콘 프로젝트는 슈퍼파워 IBM 제국이 국책사업으로 추진할 만한 알짜 프로젝트는 결코 아니었다. IBM사는 1년이라는 타임 테이블을 정해놓고, 플로리다주 보카(Boca)시의 지방 계열사에 어콘 프로젝트를 떠넘겼고,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빌 로웨(Lowe)는 다시 외부의 하청업체를 이용해 추진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IBM사의 조직 구조와 전례를 감안하면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로웨가 궁극적으로 외부 조달 방식을 택한 이유는 어콘 프로젝트가 자신의 출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뉴욕 본사의 경영진들의 관점에서는 고만고만한 프로젝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PC를 가장 손쉽게 상품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로웨의 결정은 앞으로 20년간 IBM사의 메인프레임과 중저급 미니 컴퓨터 사업의 몰락을 급속도로 앞당기는 전주곡이 되었으며, PC 시장의 클론화는 궁극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텔사의 윈텔 진영을 구축시키는 씨앗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결국 컴팩(Compaq), 델(Dell) 등 전세계의 PC 클론 회사들은 타이타닉 호 IBM을 침몰시키는 거대한 빙산으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빌 로웨에 의해 추진되고 돈 에스트리지(Don Estridge)에 의해 완성된 The PC라는 괴물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실리콘 밸리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대대적인 세대 교체를 실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