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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청보, 태평양, SK, 그리고 해태

인천은 유난히 '짜다'라는 이미지가 많다. 대표적으로, 당구에서 '인천 다마'라는 말을 들어 봤을지 모르겠다. 이 말은 자기 실력보다 낮게 다마를 놓고 치는, 소위 말해 '물리지 않으려고' 짜게 게임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비단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야구에서도 짠물 야구라고 불리는게 인천 야구다. 인천에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지만, 타지역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인천 사람들의 그런 생활 습관이 '짜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사실, 스포츠는 무관심하지만 이번 야구 경기는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해태와의 악연 때문이었다. 인천을 기반으로 했던 야구팀은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그리고 태평양 돌핀스인데, 이상하게도 강팀으로 군림했던 역사는 없었다. 태평양 돌핀스가 투수 왕국을 구축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당시 LG나 해태와 같은 강팀들에게는 한번 쉬었다 가는 보약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해태는 점잔치 못한 말로 인천팀들을 '뭘'로 알고 경기를 했다. 좋은 투수들은 그럭저럭 있어도, 빈약한 방망이 덕분에 지금은 전설로 불리는 선동열 감독이 볼펜에서 7회부터 어슬렁거리면 자리 털고 나가야 했다. 인천 야구팬들이 해태를 글자 그대로 '하이타이(HAITAI)'라고 부르며 유난히 싫어한 것도 유래가 있는 일이다. 그러던 해태와 진검승부를 하게 되었으니, 인천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없겠는가.

물론,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었던 것은 현대 유니콘스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연고를 이전해버렸더라. 아직도 배신감에 현대를 인천 연고팀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천 야구팬들도 많다. 여튼, 삼미나 청보 때의 흑역사를 다 안고 가겠다는 SK였으니, 이번 기아와의 한판 승부에 인천 야구팬들로서는 '그래, 하이타이넘들, 이번에야말로 갈아마셔 버리겠다'라며 적개심을 잔뜩 불살랐던 것이다. ;)

여담으로, 삼미나 청보가 얼마나 한국 프로 야구사에 흑역사를 썼는지는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삼미는 그냥 약팀이 아니라, '기행을 일 삼는' 팀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장명부 투수는 30승을 올렸는데, 21세기가 가기 전에 다시 한번 30승 투수는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승률 5할대의 30승 투수는 600만 달러의 사나이가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전날 마무리, 다음날 선발, 내일은 중간 계투 뛰고..) 또, 삼성 라이온스가 8 ~ 90년대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렸던, '물 먹는 사자'로 전락하게 된 사연의 중심에도 역시 삼미가 있었다. 그 때는 전기 리그, 후기 리그로 나뉘어서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겨뤄 패권을 가져가는 구조였는데, 이미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 라이온스는 보다 확실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만만한' 상대를 골라 '밀어주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롯데 자이언츠였다. 왜 가장 쉬운 삼미를 선택하지 않았냐면.. 이들이 아무리 밀어주더라도 삼미는 영원한 바닥, 기초 공사판이었거든. 더 웃겼던 것은 삼성이 의도적으로 롯데를 밀어주면서 자신들의 승수를 억지로 떨어뜨려도 삼미보다 밑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 그렇게 자신들이 차린 밥상에 롯데를 불러들인 삼성은.. 그 이후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최동원 선수의 역투로 롯데에게 한국시리즈 패권을 헌납하게 되고, 이후 글자 그대로 '물 먹는 사자'로 전락하게 된다.

여튼, 그렇게 살던 인천 연고 야구팀들에게 인천 야구 구장에 해태만 왔다하면 외야로 넘어가는 공은 그냥 해태가 또 홈런 쳤구나.. 하며 '잘~한다 해태'와 같은 자조적인 함성만 울려퍼질 따름이었으니, 그런 해태와 이번 일전을 누가 예사롭다고 할 수 있을까. 무관심하고 싶어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고, 오늘 기아의 우승이 결정된 순간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그런 감정들을 사라진 뒤, 12년만의 우승에 눈물을 흘린 이종범 선수나 최희섭 선수, 그리고 기뻐하는 광주 시민들을 보며, 그리고 끝내기 홈런을 맞고 날려버린 우승이 안타까워 우는 채병룡 선수를 보며 이번 프로야구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인천 연고팀이, 좀 다른 의미로, 우승하지 못해 분해서 울어 본 적이 있던가.

그리고, 이좀범 선수의 일본 진출 실패, 그리고 해태의 해체, 해태가 단순한 야구팀만이 아니었던 이유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훌륭한 결말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선수 생활 마지막 우승일지도 모르는 이종범 선수의 눈물, 그리고 이 시대에 답답한 심사를 가눌 수 없는 호남인들에게 호랑이 군단의 12년만의 선물, 그리고 비록 졌지만 강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짠돌이'들. 이것이야말로 스포츠가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이 아닐까.

경기 중에는 서로가 적이었을지라도, 모두는 그 승부의 하나였다. 이제 승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패자에게는 다시 한번 도전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명승부를 펼친 선수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禮)일 것이다.




* 예전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사실 어린 나이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특히, 삼미에 대한 에피소드들은 과거 하이텔에서 읽었던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