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1. 영원한 제국 : 웟슨 사단의 그랑 블루
파블로 피카소에게 지난 반 세기 동안 진행된 '모래알로 이룩한 가장 짧지만 가장 거대한 문명'이란 명제의 게르니카(Guernica)를 청탁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PC 산업의 대부(大父)로 일컬어지는 빅 블루 IBM사의 몰락 과정을 그림 중심에 그려 넣을 것이다.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듯이, 퍼스널 컴퓨터 탄생 이전의 IBM사의 모습은 디지털 문명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빅 블루 IBM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며, 60년대 초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전산화란 '효율성'의 유일한 해법은 빅 블루 마크가 새겨진 메인프레임의 시끄러운 기계음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토머스 웟슨 부자(Thomas Watson Sr. & Jr.) 사단이 이끄는 IBM사는 거대한 자본과 인력,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삼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최초의 기업으로서, 태뷸레이터(Tabulator)로 인식되는 펀치 카드의 저장 개념을 기반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사무 자동화란 패러다임을 주도해 왔다. 아울러 실리콘 시장에서 불가능할 것처럼 인식되어 온 케인스식 경영 전략을 과감하게 펼치면서 정부가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닥치는 대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70년대에 자신들이 구축한 독과점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오일 파동을 소리 없이 극복한 전설적인 이미지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이들에게 '몰락'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으며, 적어도 빅 블루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유일한 방책은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사를 침몰시킨 클레이턴 독점금지법(Clayton Antitrust Act)의 '독과점 제제'라는 극약 처방뿐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사실 IBM사는 지난 80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 온 베테랑 기업이다. 1911년 컴퓨팅태뷸레이팅리코딩(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mpany)이란 이름으로 출발하여 1924년 토머스 웟슨에 의해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란 명칭으로 변경된 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미 정부기관과 대기업에 대부분의 저장기기와 사무자동화기기를 보급해 온 빅 블루 IBM사는 예상치 못한 진공관의 양산 체제에 떠밀려 태뷸레이터 테크놀로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창사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지난 20년간 정보 저장의 유일한 선택이었던 IBM사의 마크 1(Mark 1) 태뷸레이터 기기는 10배나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 Integrator Computer) 컴퓨터의 출현으로, 펀치 카드 시스템에서 진공관과 마그네틱 테이프만으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IBM사의 모든 정책을 좌우하던 토머스 웟슨은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디지털 산업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될 진공관 체제의 컴퓨터를 안정성이 결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도입을 거부하고 만다. 당시 수천 개의 진공관이 구리선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에니악 컴퓨터는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가는 진공관을 수동적인 방법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부기관과 기업들을 상대로 성능면에서 완벽한 제품만을 납품해 온 웟슨에게는, 이로 인해 발생되는 에러에 대한 궁극적 대책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이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간단했다. "IBM사의 모든 제품은 소비자의 신뢰를 전제로 개발되고 판매된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의 제품은 IBM이란 상표를 달고 출시될 수 없다."
웟슨은 저장기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 관리의 효율성면에서 월등히 우수한 진공과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IBM사 제품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니악 테크놀로지의 특허권 인수를 거부하고 만다. 결국 진공관 특허권은 당시 IBM사의 유일한 경쟁사였던 레밍턴랜드(Remington Rand)사에게 넘겨져 세계 최초의 상용 컴퓨터인 유니박(UNIVersal Automatic Computer)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등장하게 되고, 이렇게 IBM사는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는 첫 차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웟슨이 디지털 시대의 문을 연 디 포리스트의 진공관 컴퓨터 대신 선택한 '신뢰 우선' 정책이 IBM사에게 피해만을 안겨준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IBM사는 최고의 제품만을 생산하는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게 됐고, 소비자들로부터 로열티, 즉 신뢰를 상징하는 '빅 블루(Big Blue)'라는 애칭을 선사 받게 된다. 그리고 웟슨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이어받은 웟슨 주니어는 아버지 세대에 레밍턴랜드사에 뒤진 진공관 테크놀로지의 갭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 분야 조직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때 웟슨 주니어는 기계공학 엔지니어 중심의 IBM 연구진을 전자공학 엔지니어 중심 체제로 전환시키면서 앞으로 반세기 동안 지속될 IBM 제국 영광의 초석을 깔게 된다.
웟슨 주니어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IBM사의 진공관 컴퓨터 프로젝트인 '701'은 IBM사에서 제작한 최초의 컴퓨터로서, IBM사는 3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으면 레밍턴랜드사의 유니박보다 우수한 진공관 컴퓨터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IBM사가 사활을 걸고 추진한 701 프로젝트는 미 국방성의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701 모델이 상용화 돤계에 이르는 50년대 초에는 레밍턴랜드사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로비전을 벌이게 된다.
승리의 여신은 웟슨 주니어가 이끄는 IBM사에게 미소를 보내왔다. 당시 진공관 컴퓨터 분야의 1인자가 에니악의 특허권을 보유한 레밍턴랜드사라는 데엔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IBM사의 701 모델보다 3년이나 먼저 시장에 진출한 유니박은 일단 인지도면에서 프로토 타입에 불과한 IBM사의 701 기종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때마침 터진 구 소련의 원자 폭탄 실험의 성공은 미 국방성의 대공 미사일 방어 체제를 재정비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유니박과는 달리 양산 체제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IBM사의 701 프로젝트는 자그마치 50대의 기종을 판매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IBM사는 레밍턴랜드를 제치고 부동의 표준 메인프레임 컴퓨터 회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듯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구 소련의 원폭 위협은 IBM사를 순식간에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로 탈바꿈시켜 놓았으며, 701 기종의 후속 모델인 '702'는 보다 안정된 자심 기억장치를 적용시켜 정부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에까지 침투하면서 대기업 문화에 컴퓨터라는 정보 관리 시스템을 선보이게 된다.
일단 컴퓨터 시장의 선두 자리에 복귀한 IBM사는 앞으로 50년간 거의 독보적 존재로서 컴퓨터 시장을 아우르게 된다. IBM사는 컴퓨터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사무 자동화란 대전제의 해결책은 모두 빅 블루의 몫이었다. 최고의 품질과 애프터서비스를 자랑하는 IBM사의 컴퓨터는 순식간에 컴퓨터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잠식했고, 60년대 이후 믿을 수 있는 안정적인 컴퓨터는 IBM사의 제품이 유일한 것처럼 느껴졌다. IBM사는 단숨에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고, 실리콘 산업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50년대 말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상용화되자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양산 체제를 갖추며 신제품을 생산해 냈고, 밥 노이스의 집적회로가 출시되자 세계 최대의 집적회로 생산 업체이자 소비 업체로 탈바꿈하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이스의 집적회로의 보편화로 IBM사는 보다 이동성이 가미된 시스템/360과 370을 선보이게 되는데, 이 모델은 궁극적으로 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R&D 비용을 소비하면서 탄생되며, IBM사는 시스템/360을 통해 컴퓨터 시장에 표준 운영체제라는 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게 된다.
전체 컴퓨터 시장의 80 퍼센트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IBM사의 입장에서 테크놀로지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명한 일이었으며, 이들이 구축한 제국의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모든 시대는 그 끝이 있으며, 90년대 초반 순식간에 폭락한 IBM사의 주가는 테드 호프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이후 점진적으로 누적되어 온 IBM사의 위기에 불을 지핀 사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웟슨 부자가 지난 반 세기 동안 이끌어 온 빅 블루 IBM사의 케인스식 사업 방식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Episode 32. 장렬했던 IBM 제국의 낙일(落日)
토머스 웟슨 주니어는 선친인 토머스 웟슨 1세가 IBM사의 전신인 컴퓨팅태뷸레이팅리코딩사에 입사한 해인 1914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한 컴퓨터 제국의 번영을 굳건히 다지면서 메인프레임 테크놀로지가 절정에 다다른 1971년, 57세의 젊은 나이에 제국의 왕좌를 자신의 심복인 빈센트 리어슨(Vincent Learson)에게 물려주면서 2대에 걸친 영광의 웟슨 시대를 마감하고 만다. 이 순간부터 IBM 제국의 영광은 중소 규모의 실리콘 관련 기업들에 의해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웟슨 주니어에 이어 왕좌를 이어받은 리어슨은 자신의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프랭크 캐리(Frank Cary)에게 70년대의 경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실리콘 밸리의 팽창이 절정에 다다른 70년대 말, IBM사는 외형적으로 전혀 흔들림 없는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메인프레임 기종들의 판매 실적은매년 하늘을 찌르는 상승 곡선을 그려댔고, 실질적인 경쟁 기업이 없는 시장에서 실로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해 냈다. 하지만 포스트 웟슨 시대의 지휘관들은 70년대 중반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실리콘 밸리의 열풍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혁명으로 대변되는 '무어의 법칙'을 경시하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고, 퍼스널 컴퓨터라는 새로운 대세가 자리잡기 시작한 80년대 초, 가장 거대하지만 가장 위태로운 기업으로 밸리의 변경을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또, 비운의 80년대를 이끌어간 IBM사의 두 지휘관 존 오펠(John Opel)과 존 에이커스(John Akers)는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과 더불어 제국의 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매년 상승 곡선을 그리는 재무제표를 보면서 마치 웟슨 시대의 영광을 자신들이 재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80년간 지켜온 메인프레임과 오픈 시스템으로 제작된 퍼스널 컴퓨터는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씨에 불과했으며, 지난 40년간 제국의 살과 피를 제공한 메인프레임 테크놀로지의 패러다임은 벌써 IBM사와 운명을 달리한 후였다.
80년대 들어 그 실체를 드러낸 실리콘 밸리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IBM사는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첫째는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시작된 무어의 법칙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신들의 진정한 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80년대 중반과 후반에 지속적으로 상승한 IBM사의 매출액은 실로 신기루에 불과했다. 메인프레임 기종을 주력 사업으로 추진해 온 IBM사는 자신들의 주력 기종을 대기업에 배포하면서, 판매 형식보다는 리스(임대) 형식을 취해 매달 혹은 매 분기 지불하는 임대료보다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요구하는 시스템 관리와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에 보여준 IBM사의 매출 상승은 이러한 임대 형식을 통한 클라이언트 확대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80년대 미국의 대기업들은 상승하는 이자율과 급락하는 메인프레임 기종들의 가격에 대한 방어책으로 임대 형식의 기존 구입 체제를 구매 형식으로 전환하게 되며, 이에 따라 IBM사의 매출액은 거품으로 가득 차오르게 된다. 때마침 불어닥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혁명은 IBM사가 지난 반세기 동안 독불장군처럼 추진해 온 케인스식 경영 마인드를 붕괴시켜 버리고, 실리콘 밸리의 변경은 그 실체를 드러내며 IBM사의 낙일(落日)을 예고하게 된다.
웟슨 부자가 추진해 온 거시경제 개념의 케인스식 사업의 실패는 패러다임의 불가피한 전환을 의미했으며, 거대한 인프라는 중심으로 형성된 규모의 경제에 의한 실패란 전체적인 산업의 몰락을 의미했다. 즉, IBM사가 거시 시장을 중심으로 추진해 온 케인스식 사업 정책에 제동이 걸린 것은 곧 메인프레임 시장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IBM사는 자사 매출액의 70퍼센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은 무어의 법칙을 신봉하는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에 비해 IBM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하면서 그들의 궁극적인 낙일을 90년대로 넘겨버리고 만다. 만약 오늘날처럼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민감한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이 당시의 IBM사를 진단했다면 그들은 필시 80년대 후반 IBM사의 주가에 극약 처방을 내렸겠지만, 무어의 법칙이 진정한 실체를 드러내기 전인 80년대 중반에는 밸리의 변경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IBM 제국은 몰락해 갔다. 그들은 적이 보이지 않았기에 적을 알지 못했고, 밸리의 변경에 둔감했기에 더더욱 자신을 알지 못했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실리콘 제국을 붕괴시킨 궁극적인 원인도 독과점이라는 극약 처방이 아니라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통해 실리콘 밸리의 중력으로 급부상한 무어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었다.
70년대 중반 밸리의 폭풍으로 자라기 시작한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IBM 제국에 주도면밀하게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신호를 보내왔다. 디지털이큅먼트(DEC)사와 HP사의 미니 컴퓨터 침공을 시작으로,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MS사의 소프트웨어는 지난 20년간 컴퓨터 시장의 몸통인 IBM사를 서서히 마비시켜 왔다. 18개월을 주기로 변신하지 못하면 그 어떤 기업도 생존할 수 없다는 무어의 법칙은 빅 블루 IBM사에도 예외없이 적용됐고, 90년대 초반 천문학적 손실을 감당하면서 구조 조정을 단행한 IBM사에게선 웟슨 시대의 웅장했던 제국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작은 곳에 있었다. 웟슨 시대의 빅 불루 IBM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과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보유한 완벽한 기업이었으며, 소비자들은 IBM 제품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리고 웟슨은 이를 기반으로 자신이 고용한 직원들에게 평생 직장이라는 안정성을 부여했다. 아무리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성장을 거듭하던 IBM 제국은 컴퓨터 산업의 유토피아로 인식되었고, 실리콘 밸리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원시적인 제3세계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IBM 제국이 완전 고용을 창출한 완벽한 유토피아였다면, 실리콘 밸리는 아서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의 축소판으로서, 처절하게 펼쳐지는 약육강식의 경쟁 구도를 극복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정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상대적인 굶주림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과 함께 순식간에 위협적 요소로 등장했고, 이들이 무방비 상태의 IBM 제국을 향해 던진 칼과 창은 실로 매서울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IBM사는 뒤늦게 밸리의 변경을 눈치채고 방어 체제를 구축하면서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IBM 제국을 추스르기 위해 18개월을 주기로 주력 상품을 교체하는 밸리의 게임에 동참하지만, 존 에이커스에 이어 경영권을 인계받은 루이스 거스트너(Louis Gerstner)가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 빅 블루 IBM사의 이미지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곧이어 터진 월 스트리트의 두 번째 폭격은 IBM사에게 단일 기업으로서는 사상 최고치인 7,500억 달러의 주식 손실을 안겨주면서 더 이상 사업을 추진할 가치가 없는 기업으로 낙인찍고 만다.
한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IBM사에 무슨 일이 있나?"라는 풍문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IBM 직원들에게 현실로 들이닥쳤고, IBM사의 주력 사업 지대인 뉴욕 주의 허드슨 밸리(Hudson Valley)는 브로드웨이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무대보다 훨씬 생생한 무대를 각본 없이 연출하고 있었다. IBM사의 주가가 사상 최대치로 폭락하던 90년대 초, IBM 제국의 신화를 탄생시킨 토머스 웟슨 주니어는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IBM사는 반드시 컴백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하지만, 운명의 반전은 더 이상 현재 진행형이 아니었다. 밸리의 변경이 극에 달하던 1993년, 실리콘 밸리는 윈텔 제국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었으며, 이 새로운 제국의 실세로 등장한 두 명의 워리어인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의 사전에 '데탕트'라는 단어는 없었다.
Episode 33. IBM사의 운영체제 헌팅 : 하늘에서 운명이 바뀐 사나이
에드 로버츠의 미츠사(MITS)와 베이식 언어 분쟁을 슬기롭게 극복한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다. 초창기 실리콘 밸리에 비친 빌 게이츠의 이미지는 컴퓨터 언어 시장의 신동 내지는 마술사였다. 80년대 초반 퍼스널 컴퓨터가 일반 사용자들을 상대로 그 시앙을 확대해 나가고 있을 무렵, 소프트웨어 시장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게리 킬달의 디지털리서치사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암암리에 형성된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빌 게이츠에겐 언어 시장을, 그리고 게리 킬달에게는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상호 불침법의 이해 관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게리 킬달은 디지털리서치사에 언어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 있으며 MS사를 소개시켜 줬고, 빌 게이츠 또한 운영체제가 필요한 고객을 만나면 바로 디지털리서치사의 CP/M을 언급해 주었다.
소프트웨어 시장이 아직은 독립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80년대 초반까지는 빌 게이츠는 결코 운영체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IBM사에게 조차 비교적 메모리를 많이 잡아먹는 운영체제의 도입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내부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PC 시장에서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한 애플과 코모도어 기종들은 모두 운영체제를 탑재하지 않은 상태로 시장에 선보였으며, IBM PC의 실질적 소비층을 일반 사용자로 맞춘 이상 IBM사가 염두에 둔 PC의 운영체제는 필수 조건이라기보다 선택에 가까웠고, 그들은 운영체제 없이도 PC를 판매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소프트웨어 시장은 아직 하드웨어와 결합된 틈새 시장에 불과했고, 빌 게이츠조차 언어 분야의 소프트웨어가 운영체제 분야를 압도할 것이라 점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게이츠는 IBM사의 어콘 프로젝트의 운영체제 담당자인 잭 샘스(Jack Sams)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잭 샘스는 빌 게이츠에게 IBM사가 현재 PC를 제작하고 있다는 언급 없이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품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표현과 함께 비즈니스 미팅을 제안한다. 당시 IBM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갑(甲)의 위치에게 모든 미팅을 주관해 온 컴퓨터 시장의 대표 기업이었고, MS사는 빌 게이츠 자신을 포함해 총 직원이 서른 명을 약간 밑도는 규모의 영세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IBM사가 미팅을 제안했다는 사실 자체가 MS와 같은 영세 기업으로서는 영광이라고 볼 수 있지만, 빌 게이츠는 샘스의 예상을 뒤엎고 2주 후에나 미팅이 가능하다고 거드름을 피우게 된다. 물론 샘스는 빌 게이츠와 통화한 바로 다음 날 워싱턴 주의 밸라브 시로 날아가게 되며, 여기서부터 IBM사는 MS사와의 끈질긴 악연에 테이프를 끊게 되고, 빌 게이츠는 자신을 세계에게 가장 부자로 만들어주게 될 꿈의 소프트웨어인 도스 운영체제를 발견(?)하게 된다. 잭 샘스와 빌 게이츠의 첫번째 만남은 간단한 상견례 절차를 거친 후 끝이 났지만,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오늘날 MS사의 아성을 건설하는 초석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잭 샘스와 빌 게이츠의 두 번째 만남은 한 달 후인 1980년 8월에 이루어진다. 이 자리에서 샘스는 "인텔 프로세서 전용 운영체제를 우리에게 판매할 용의가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돌발 상황을 연출하지만, 빌 게이츠는 "당신들이 운영체제를 원한다면 번지를 잘못 택했다. 운영체제는 실리콘 밸리에 소재한 디지털리서치사에서 제작하고 있으며, 원한다면 그쪽 담당자를 주선해 주겠다."라는 간단한 말로 답하고 만다. 빌 게이츠는 그 자리에서 디지털리서치사의 담당자와 통화한 후, 바로 다음 날 샌타크루즈 해변에 위치한 퍼시픽그루브 시로 잭 샘스를 출발시킨다. 당시 빌 게이츠는 운영체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며, 게리 킬달의 운영체제가 자신의 베이식 언어보다 상업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IBM사가 제시한 세기의 오퍼를 빌 게이츠가 간단히 거부함으로써 이제 행운의 화살은 게리 킬달의 CP/M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컬한 면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잭 샘스가 금세기 최고의 사건으로 진화될 IBM PC의 운영체제 계약을 디지털리서치사와 맺기 위해 먼 길을 날아 퍼시픽그루브 시에 도착했을 때, 게리 킬달은 자신이 새로 구입한 경비행기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 날 잭 샘스가 디지털리서치사의 대표 자격으로 대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운영체제의 기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킬달의 아내뿐이었고, 여기서 도로시 킬달은 IBM사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만다.
잭 샘스는 운영체제 계약의 조건으로 IBM사가 제시하는 비공개 문서(Nondisclosure Agreement)에 사인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디지털리서치사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약관으로 구성된 이 계약서를 현직 변호사인 도로시 킬달이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IBM사가 요구한 비공개 문서는 IBM사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약관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당시 IBM사가 얼마나 우월한 위치에서 사업 계약을 체결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잭 샘스가 제시한 비공개 문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IBM사는 디지털리서치와의 계약에서 얻는 모든 정보를 누구에게나 공개할 수 있지만, 디지털리서치사는 IBM에서 제공하는 어떤 정보도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없으며, 만약 이 약관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적절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매우 공격적이고 불공평한 계약 조건이었다.
도로시 킬달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킬달 부부는 벌써 CP/M 운영체제의 성공적인 판매로 실리콘 밸리의 백만장자 대열에 올라서 있었고, IBM사의 불합리하고 위험성 있는 계약을 통하지 않고서도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부를 축적해 놓고 있었다. 게리 킬달은 잭 샘스의 IBM 진영과 얼굴 한 번 대면한 적 없이 자신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때 제3자들에 의해 결정나 버린 자신의 운명을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게리 킬달이 디지털리서치사로 복귀했을 때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 있었고, 잭 샘스는 IBM PC의 운영체제 문제를 원점으로 복쉬시킨 채 아무런 소득 없이 동부의 플로리다 보카시로 날아가버린 후였다.
Episode 34.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QDOS)
동부의 플로리다 보카시로 복귀한 샘스는 무의미했던 운영체제 헌팅 출장 결과를 어콘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빌 로웨(Bill Lowe)에게 보고한다. 이후 이들은 IBM PC의 생존 여부를 판가름하게 될, 뉴욕 본사의 중역들을 상대로 진행된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된다. 뉴욕 본사에서 진행된 어콘 프로제그의 프레젠테이션은 IBM PC의 프로토 타입을 중심으로 운영체제는 없지만 당시의 PC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선명한 그래픽을 선보이면서 무난하게 진행됐다. IBM사 중역들은 아직 PC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일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이 자사의 매출에 그다지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IBM PC는 본사의 덤덤한 반응 속에서 출시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문제는 운영체제에 있었다. 빌 로웨와 잭 샘스는 어콘 프로젝트에 운영체제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PC 시장에 IBM사가 차별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운영체제를 접목시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개량형 PC를 선보이는 길 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인텔 프로세서에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운영체제는 게리 킬달의 CP/M이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잭 샘스는 게리 킬달을 자신의 요구 조건으로 설득시키는 길만이 IBM PC의 출하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콘 프로젝트의 피날레를 장식할 운영체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왔다. 게리 킬달과 IBM사의 비공개 문서 사건을 접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일급 참모인 폴 앨런, 스티브 발머, 그리고 케이 니시(Kay Nishi)를 한 자리에 불러놓고, 운영체제 사업에 뛰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게 된다. 당시 MS사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프로그래머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MS사가 운영체제 시장에 뛰어든다는 사실은 게리 킬달의 디지털리서치로 하여금 언어 프로그램 시장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소프트웨어가 돈이 되지 않는 세상에 서로 헐뜯는 길은 자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니시의 강력한 설득을 시작으로 빌 게이츠와 앨런은 운영체제 시장에 뛰어드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하지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라는 속담처럼, MS사는 PC용 운영체제가 없음은 물론 이를 제작할 능력조차 없는 소규모 기업에 불과했다. IBM사는 적어도 두 달 이내에 안정적인 운영체제가 필요했고, 빌 게이츠가 CP/M과 대등한 운영체제를 제작하려면 적어도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서 빌 게이츠의 천운(天運)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과 빌 게이츠의 차이는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일반 아마추어들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즐길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비즈니스가 우선이었다. 미츠사와 베이식 언어의 소유권 문제가 대부되었을 때도 빌 게이츠는 대부분의 아마추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법적 대응이라는 절차를 거쳐 자신의 자산을 지켰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빌 게이츠의 오른팔격인 폴 앨런은 시애틀 시 근교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의 동호회를 수소문한 후, 훗날 MS-DOS와 윈도로 거듭나게 될 큐도스(QDOS : Quick & Dirty Operating System)를 발견하게 된다.
팀 패터슨(Tim Paterson)이란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제작한 큐도스는 바로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가 지닌 대부분의 기능들을 보유한 잭 샘스가 찾던 완벽한 대안이었다. 문제는 이 큐도스란 운영체제가 현실적으로 게리 킬달의 코드를 무단으로 도용한 CP/M 클론이라는 것이었지만, 당시 소프트웨어의 지적 재산권 조항 또한 게리 킬달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고, 디지털리서치사 또한 사활을 걸고 CP/M을 사수할 생각이 없었다. 빌 게이츠는 바로 잭 샘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운영체제를 확보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로써 IBM사의 역사적인 운영체제 헌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만다.
잭 샘스가 운영체제를 계약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사항은 MS사와 IBM사 가운데 어느 쪽이 큐도스의 소유권을 갖느냐는 것이었는데, IBM사는 빌 게이츠에게 선뜻 큐도스의 모든 법적 소유권을 넘기고 마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당시 IBM사가 운영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PC라는 하드웨어에 물려 있는 하찮은 소프트웨어에 불과한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운영체제의 소유권을 MS사에게 줌으로써 큐도스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빌 게이츠에게 떠넘기려는 속셈도 있었다.
빌 게이츠는 7만 5,000달러에 팀 패터슨의 큐도스 소유권을 사들이게 되고, 정확히 13년 후 MS사는 영원한 제국으로 남을 것처럼 보였던 빅 블루 IBM사를 격침시키고 만다. 지난 15년간 IBM사는 7만 5,000달러에 빼앗긴 큐도스의 소유권을 만회하려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빌 게이츠를 잡을 방법은 이 세상에 없었다. 단돈 7만 5,000달러에 빌 게이츠의 수중에 들어와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Quick & Dirty OS)'란 비천한 이름에서 금세기 최고의 소프트웨어인 윈도 시리즈로 승화하게 된 MS-DOS는 지금부터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지켜야 할 보배로 떠오르게 된다.
Episode 35. 'CP/M 86'이란 운영체제가 있었으니...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란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단돈 7만 5,000달러에 빌 게이츠의 수중에 들어가 큐도스(Q-DOS: Quick & Dirsty OS)는 IBM사의 파격적인 PC 캠페인의 주역으로 동승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일반 사용자들에게 '운영체제'라는 생소한 용어를 보편화시키기 시작한다. 수퍼맨에 버금가는 미국적 캐릭터인 찰리 채플린을 전면에 내세운 IBM사의 홍보 전략과 지난 반세기 동안 닦아온 물샐 틈 없는 유통망은 IBM PC를 출시 1년 만에 전체 PC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T-렉스(티라노사우루스)로 돌변시켜 버렸고, 애플사를 주축으로 한 기존의 PC 제조업체들은 눈치 빠른 밸로서랩터의 무리들로 둔갑해 버리고 만다.
데뷔 첫 해인 1981년부터 급속도로 PC 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한 BIM사는 이듬해, 오늘날 디지털 혁명 내지는 사무자동화란 개념을 현실로 승화시키게 될 미치 카포의 '로터스 1-2-3'를 만나게 된다. 이 순간부터 IBM사의 PC는 일반 사용자들은 물론 정부기관과 기업으로까지 폭발적인 속도록 확산되면서, 기존에 주류로 분류되던 애플사, 코모도어사, 그리고 탠디사의 PC를 IBM사가 미치지 못하는 틈새 시장에서만 생존하는 비주류 PC로 전락시키고 만다. IBM PC의 출현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PC 시장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는 소수의 프로그래머들과 게임 마니아들을 주축으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라는 매체가 전자식 타자기와 미니 컴퓨터의 스프레드시트보다 우수하거나 적어도 대등한 개념의 디지털 미디엄으로 정착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주먹구구식 매매 형식을 탈피하지 못한 원시적인 PC 시장에 IBM사의 대자본이 진출하면서, 지극히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일반 사용자들을 주소비층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시애틀 컴퓨터사로부터 사들인 큐도스의 명칭은 빅 블루 IBM사에게는 'PC-도스'란 이름으로 IBM PC의 하드웨어(본체)에 번들로 판매되었으며, IBM사를 제외한 모든 클론 PC 업체들에는 'MS-도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이로써 PC 시장의 일개 영세 업체에 불과하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도스(Disk Operating System)라 불리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명사로서 보통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업 기반은 PC 시장의 운영체제보다는 전문 프로그래머들을 위한 언어 시장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당시 운영체제의 현실적 1인자의 위치는 누가 뭐래도 CP/M을 탄생시킨 게리 킬달의 몫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빌 게이츠라는 인물이 단 한 명의 전담 프로그래머도 없이 게리 킬달이 제작한 CP/M 운영체제의 변종에 불과한 족보도 알 수 없는 정체 불명의 운영체제의 판권을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마무리 코딩 작업에 들어가 있는 CP/M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CP/M 86'이란 운영체제가 PC 시장을 석권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으며, 상술 좋게 선수를 친 빌 게이츠의 MS-도스에는 그리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게리 킬달은 IBM PC에 번들로 판매되고 있는 도스라는 이름의 운영체제가 자신의 CP/M 운영체제의 코드를 도용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팀 패터슨이 운영하던 시애틀컴퓨터사와도 빌 게이츠보다 훨씬 먼저 친분 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팀 패터슨은 자신의 큐도스가 IBM PC에 번들로 판매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빌 게이츠에게 판권을 넘기고 말았다). 사실 빌 게이츠와 게리 킬달은 이 역사적인 큐도스 운영체제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만 해도 경쟁 회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호 신뢰의 공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시에서 자신들의 사업 기반을 워싱턴 주의 밸라뷰 시로 이전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할 당시, 게리 킬달은 동종 산업에 종사하는 동료이자 고향 선배의 입장에서 소프트웨어 시장의 전반적인 흐름을 조언할 정도로 이들의 친분 관계를 각별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운영체제 시장의 규모가 IBM PC의 출현으로 뜻밖의 국면을 맞게 되자. 디지털리서치사 또한 더 이상 수동적 위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을 관망할 수만은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리서치사의 지휘관인 게리 킬달은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로 간주되는 '리카도의 두 가지 재능'을 모두 갖춘 인물이 결코 아니었으며, 특히 사업가적 자질면에서는 하루 아침에 동맹 관계에서 경쟁 관계로 탈바꿈한 빌 게이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이츠와 킬달 사이에 암암리에 구축되어 있던 모종의 불침범 이해 관계는 빌 게이츠의 돌발적인 침공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며, 순수한 엔지니어에 불과하던 게리 킬달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빌 게이츠에 대한 모든 신뢰를 상실하고 만다. 악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전개된 빌 게이츠와 게리 킬달의 관계는 이렇게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되고, 디지털리서치사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인 IBM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과론적 입장에서 볼 때, IBM사가 PC 운영체제를 헌팅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에서 도의적으로 무리를 일으켰으며, 또 누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디지털리서치사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했는지는 당시 소프트웨어 산업의 분위기로 봐서 판가름하기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업가보다는 엔지니어에 가까웠던 게리 킬달로 더욱 우수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면 사용자들이 자신의 운영체제를 택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과 함께 자신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 IBM사, 그리고 시애틀컴퓨터사에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킬달은 자신의 프로그래머적 능력을 누구보다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운영체제 분야에서만은 부동의 1인자임을 자부하던 그가 시장에 새롭게 내놓은 CP/M 86은 모든 면에서 MS도스의 기능을 압도하는 우수한 운영체제로 인정받게 된다. 빅 블루 IBM사 역시 까다로운 조건 없이 디지털리서치사와 CP/M 86 운영체제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게리 킬달은 실리콘 밸리에서 자신의 입지를 궁극적으로 앗아가게 될 IBM사와의 뒤늦은 계약으로, 마치 디지털리서치사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제치고 운영체제 시장의 새로운 표준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올랐지만, 막상 PC 시장에 선보인 CP/M 86 버전을 찾는 사용자들은 거의 없었다.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 게리 킬달의 CP/M 86이 당시 번들로 판매되던 MS-도스와 비교해 기능면에서 차별성을 지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당시 일반 사용자들이 운영체제의 성능에 관한 변별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에는 PC 시장의 역사가 너무나 짧았다. CP/M의 궁극적 종말은 IBM사의 가격 책정에서 비롯되었다.
게리 킬달은 빌 게이츠와는 대조적으로 IBM사와의 거의 대등한 조건으로 CP/M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추진하였다. 아울러 IBM사의 반대를 무릅쓰며 자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CP/M이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번들로 판매될 것을 끝까지 고수하는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작 CP/M의 가격 책정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전적으로 IBM사에게 일임하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하고 만다.
IBM사가 디지털리서치사에게 치명적으로 불공평한 가격 책정을 단행하면서 CP/M 86 버전을 PC 시장에 내놓은 정확한 이유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 40달러에 판매되는 MS-도스와 무려 다섯 배에 달하는 200달러에 판매되는 CP/M 86 운영체제 사싱에서 양자택일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디지털리서치사도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능을 보유한 CP/M 86 버전이 MS-도스에 비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될 것으로 예측은 했지만, 다섯 배나 높은 가격은 이 세상의 어떤 소프트웨어도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CP/M 86에 대한 가격 결정권은 전적으로 IBM사에 달려 있었고, IBM사가 의도적으로 CP/M 86 버전을 PC 시장에서 사장시켰다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조치일뿐더러, IBM사가 CP/M 86을 전략 차원에서 파괴했다 해도 약육강식의 잔혹한 게임의 법칙이 정석으로 간주되는 실리콘 밸리의 먹이 사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경영 전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붕괴시켜 버린 IBM사의 고의성(?)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겠지만, 게리 킬달은 여기서 또다시 후퇴하는 소극성을 보이면서 실리콘 밸리의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영을 수락하고 만다.
파블로 피카소에게 지난 반 세기 동안 진행된 '모래알로 이룩한 가장 짧지만 가장 거대한 문명'이란 명제의 게르니카(Guernica)를 청탁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PC 산업의 대부(大父)로 일컬어지는 빅 블루 IBM사의 몰락 과정을 그림 중심에 그려 넣을 것이다.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듯이, 퍼스널 컴퓨터 탄생 이전의 IBM사의 모습은 디지털 문명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빅 블루 IBM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며, 60년대 초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전산화란 '효율성'의 유일한 해법은 빅 블루 마크가 새겨진 메인프레임의 시끄러운 기계음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토머스 웟슨 부자(Thomas Watson Sr. & Jr.) 사단이 이끄는 IBM사는 거대한 자본과 인력,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삼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최초의 기업으로서, 태뷸레이터(Tabulator)로 인식되는 펀치 카드의 저장 개념을 기반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사무 자동화란 패러다임을 주도해 왔다. 아울러 실리콘 시장에서 불가능할 것처럼 인식되어 온 케인스식 경영 전략을 과감하게 펼치면서 정부가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닥치는 대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70년대에 자신들이 구축한 독과점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오일 파동을 소리 없이 극복한 전설적인 이미지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이들에게 '몰락'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으며, 적어도 빅 블루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유일한 방책은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사를 침몰시킨 클레이턴 독점금지법(Clayton Antitrust Act)의 '독과점 제제'라는 극약 처방뿐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사실 IBM사는 지난 80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 온 베테랑 기업이다. 1911년 컴퓨팅태뷸레이팅리코딩(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mpany)이란 이름으로 출발하여 1924년 토머스 웟슨에 의해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란 명칭으로 변경된 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미 정부기관과 대기업에 대부분의 저장기기와 사무자동화기기를 보급해 온 빅 블루 IBM사는 예상치 못한 진공관의 양산 체제에 떠밀려 태뷸레이터 테크놀로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창사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지난 20년간 정보 저장의 유일한 선택이었던 IBM사의 마크 1(Mark 1) 태뷸레이터 기기는 10배나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 Integrator Computer) 컴퓨터의 출현으로, 펀치 카드 시스템에서 진공관과 마그네틱 테이프만으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IBM사의 모든 정책을 좌우하던 토머스 웟슨은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디지털 산업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될 진공관 체제의 컴퓨터를 안정성이 결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도입을 거부하고 만다. 당시 수천 개의 진공관이 구리선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에니악 컴퓨터는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가는 진공관을 수동적인 방법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부기관과 기업들을 상대로 성능면에서 완벽한 제품만을 납품해 온 웟슨에게는, 이로 인해 발생되는 에러에 대한 궁극적 대책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이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간단했다. "IBM사의 모든 제품은 소비자의 신뢰를 전제로 개발되고 판매된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의 제품은 IBM이란 상표를 달고 출시될 수 없다."
웟슨은 저장기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 관리의 효율성면에서 월등히 우수한 진공과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IBM사 제품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니악 테크놀로지의 특허권 인수를 거부하고 만다. 결국 진공관 특허권은 당시 IBM사의 유일한 경쟁사였던 레밍턴랜드(Remington Rand)사에게 넘겨져 세계 최초의 상용 컴퓨터인 유니박(UNIVersal Automatic Computer)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등장하게 되고, 이렇게 IBM사는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는 첫 차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웟슨이 디지털 시대의 문을 연 디 포리스트의 진공관 컴퓨터 대신 선택한 '신뢰 우선' 정책이 IBM사에게 피해만을 안겨준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IBM사는 최고의 제품만을 생산하는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게 됐고, 소비자들로부터 로열티, 즉 신뢰를 상징하는 '빅 블루(Big Blue)'라는 애칭을 선사 받게 된다. 그리고 웟슨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이어받은 웟슨 주니어는 아버지 세대에 레밍턴랜드사에 뒤진 진공관 테크놀로지의 갭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 분야 조직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때 웟슨 주니어는 기계공학 엔지니어 중심의 IBM 연구진을 전자공학 엔지니어 중심 체제로 전환시키면서 앞으로 반세기 동안 지속될 IBM 제국 영광의 초석을 깔게 된다.
웟슨 주니어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IBM사의 진공관 컴퓨터 프로젝트인 '701'은 IBM사에서 제작한 최초의 컴퓨터로서, IBM사는 3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으면 레밍턴랜드사의 유니박보다 우수한 진공관 컴퓨터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IBM사가 사활을 걸고 추진한 701 프로젝트는 미 국방성의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701 모델이 상용화 돤계에 이르는 50년대 초에는 레밍턴랜드사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로비전을 벌이게 된다.
승리의 여신은 웟슨 주니어가 이끄는 IBM사에게 미소를 보내왔다. 당시 진공관 컴퓨터 분야의 1인자가 에니악의 특허권을 보유한 레밍턴랜드사라는 데엔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IBM사의 701 모델보다 3년이나 먼저 시장에 진출한 유니박은 일단 인지도면에서 프로토 타입에 불과한 IBM사의 701 기종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때마침 터진 구 소련의 원자 폭탄 실험의 성공은 미 국방성의 대공 미사일 방어 체제를 재정비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유니박과는 달리 양산 체제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IBM사의 701 프로젝트는 자그마치 50대의 기종을 판매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IBM사는 레밍턴랜드를 제치고 부동의 표준 메인프레임 컴퓨터 회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듯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구 소련의 원폭 위협은 IBM사를 순식간에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로 탈바꿈시켜 놓았으며, 701 기종의 후속 모델인 '702'는 보다 안정된 자심 기억장치를 적용시켜 정부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에까지 침투하면서 대기업 문화에 컴퓨터라는 정보 관리 시스템을 선보이게 된다.
일단 컴퓨터 시장의 선두 자리에 복귀한 IBM사는 앞으로 50년간 거의 독보적 존재로서 컴퓨터 시장을 아우르게 된다. IBM사는 컴퓨터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사무 자동화란 대전제의 해결책은 모두 빅 블루의 몫이었다. 최고의 품질과 애프터서비스를 자랑하는 IBM사의 컴퓨터는 순식간에 컴퓨터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잠식했고, 60년대 이후 믿을 수 있는 안정적인 컴퓨터는 IBM사의 제품이 유일한 것처럼 느껴졌다. IBM사는 단숨에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고, 실리콘 산업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50년대 말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상용화되자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양산 체제를 갖추며 신제품을 생산해 냈고, 밥 노이스의 집적회로가 출시되자 세계 최대의 집적회로 생산 업체이자 소비 업체로 탈바꿈하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이스의 집적회로의 보편화로 IBM사는 보다 이동성이 가미된 시스템/360과 370을 선보이게 되는데, 이 모델은 궁극적으로 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R&D 비용을 소비하면서 탄생되며, IBM사는 시스템/360을 통해 컴퓨터 시장에 표준 운영체제라는 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게 된다.
전체 컴퓨터 시장의 80 퍼센트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IBM사의 입장에서 테크놀로지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명한 일이었으며, 이들이 구축한 제국의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모든 시대는 그 끝이 있으며, 90년대 초반 순식간에 폭락한 IBM사의 주가는 테드 호프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이후 점진적으로 누적되어 온 IBM사의 위기에 불을 지핀 사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웟슨 부자가 지난 반 세기 동안 이끌어 온 빅 블루 IBM사의 케인스식 사업 방식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Episode 32. 장렬했던 IBM 제국의 낙일(落日)
토머스 웟슨 주니어는 선친인 토머스 웟슨 1세가 IBM사의 전신인 컴퓨팅태뷸레이팅리코딩사에 입사한 해인 1914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한 컴퓨터 제국의 번영을 굳건히 다지면서 메인프레임 테크놀로지가 절정에 다다른 1971년, 57세의 젊은 나이에 제국의 왕좌를 자신의 심복인 빈센트 리어슨(Vincent Learson)에게 물려주면서 2대에 걸친 영광의 웟슨 시대를 마감하고 만다. 이 순간부터 IBM 제국의 영광은 중소 규모의 실리콘 관련 기업들에 의해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웟슨 주니어에 이어 왕좌를 이어받은 리어슨은 자신의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프랭크 캐리(Frank Cary)에게 70년대의 경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실리콘 밸리의 팽창이 절정에 다다른 70년대 말, IBM사는 외형적으로 전혀 흔들림 없는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메인프레임 기종들의 판매 실적은매년 하늘을 찌르는 상승 곡선을 그려댔고, 실질적인 경쟁 기업이 없는 시장에서 실로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해 냈다. 하지만 포스트 웟슨 시대의 지휘관들은 70년대 중반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실리콘 밸리의 열풍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혁명으로 대변되는 '무어의 법칙'을 경시하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고, 퍼스널 컴퓨터라는 새로운 대세가 자리잡기 시작한 80년대 초, 가장 거대하지만 가장 위태로운 기업으로 밸리의 변경을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또, 비운의 80년대를 이끌어간 IBM사의 두 지휘관 존 오펠(John Opel)과 존 에이커스(John Akers)는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과 더불어 제국의 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매년 상승 곡선을 그리는 재무제표를 보면서 마치 웟슨 시대의 영광을 자신들이 재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80년간 지켜온 메인프레임과 오픈 시스템으로 제작된 퍼스널 컴퓨터는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씨에 불과했으며, 지난 40년간 제국의 살과 피를 제공한 메인프레임 테크놀로지의 패러다임은 벌써 IBM사와 운명을 달리한 후였다.
80년대 들어 그 실체를 드러낸 실리콘 밸리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IBM사는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첫째는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시작된 무어의 법칙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신들의 진정한 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80년대 중반과 후반에 지속적으로 상승한 IBM사의 매출액은 실로 신기루에 불과했다. 메인프레임 기종을 주력 사업으로 추진해 온 IBM사는 자신들의 주력 기종을 대기업에 배포하면서, 판매 형식보다는 리스(임대) 형식을 취해 매달 혹은 매 분기 지불하는 임대료보다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요구하는 시스템 관리와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에 보여준 IBM사의 매출 상승은 이러한 임대 형식을 통한 클라이언트 확대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80년대 미국의 대기업들은 상승하는 이자율과 급락하는 메인프레임 기종들의 가격에 대한 방어책으로 임대 형식의 기존 구입 체제를 구매 형식으로 전환하게 되며, 이에 따라 IBM사의 매출액은 거품으로 가득 차오르게 된다. 때마침 불어닥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혁명은 IBM사가 지난 반세기 동안 독불장군처럼 추진해 온 케인스식 경영 마인드를 붕괴시켜 버리고, 실리콘 밸리의 변경은 그 실체를 드러내며 IBM사의 낙일(落日)을 예고하게 된다.
웟슨 부자가 추진해 온 거시경제 개념의 케인스식 사업의 실패는 패러다임의 불가피한 전환을 의미했으며, 거대한 인프라는 중심으로 형성된 규모의 경제에 의한 실패란 전체적인 산업의 몰락을 의미했다. 즉, IBM사가 거시 시장을 중심으로 추진해 온 케인스식 사업 정책에 제동이 걸린 것은 곧 메인프레임 시장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IBM사는 자사 매출액의 70퍼센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은 무어의 법칙을 신봉하는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에 비해 IBM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하면서 그들의 궁극적인 낙일을 90년대로 넘겨버리고 만다. 만약 오늘날처럼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민감한 월 스트리트의 분석가들이 당시의 IBM사를 진단했다면 그들은 필시 80년대 후반 IBM사의 주가에 극약 처방을 내렸겠지만, 무어의 법칙이 진정한 실체를 드러내기 전인 80년대 중반에는 밸리의 변경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IBM 제국은 몰락해 갔다. 그들은 적이 보이지 않았기에 적을 알지 못했고, 밸리의 변경에 둔감했기에 더더욱 자신을 알지 못했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실리콘 제국을 붕괴시킨 궁극적인 원인도 독과점이라는 극약 처방이 아니라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통해 실리콘 밸리의 중력으로 급부상한 무어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었다.
70년대 중반 밸리의 폭풍으로 자라기 시작한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IBM 제국에 주도면밀하게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신호를 보내왔다. 디지털이큅먼트(DEC)사와 HP사의 미니 컴퓨터 침공을 시작으로,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MS사의 소프트웨어는 지난 20년간 컴퓨터 시장의 몸통인 IBM사를 서서히 마비시켜 왔다. 18개월을 주기로 변신하지 못하면 그 어떤 기업도 생존할 수 없다는 무어의 법칙은 빅 블루 IBM사에도 예외없이 적용됐고, 90년대 초반 천문학적 손실을 감당하면서 구조 조정을 단행한 IBM사에게선 웟슨 시대의 웅장했던 제국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작은 곳에 있었다. 웟슨 시대의 빅 불루 IBM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과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보유한 완벽한 기업이었으며, 소비자들은 IBM 제품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리고 웟슨은 이를 기반으로 자신이 고용한 직원들에게 평생 직장이라는 안정성을 부여했다. 아무리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성장을 거듭하던 IBM 제국은 컴퓨터 산업의 유토피아로 인식되었고, 실리콘 밸리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원시적인 제3세계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IBM 제국이 완전 고용을 창출한 완벽한 유토피아였다면, 실리콘 밸리는 아서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의 축소판으로서, 처절하게 펼쳐지는 약육강식의 경쟁 구도를 극복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정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상대적인 굶주림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과 함께 순식간에 위협적 요소로 등장했고, 이들이 무방비 상태의 IBM 제국을 향해 던진 칼과 창은 실로 매서울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IBM사는 뒤늦게 밸리의 변경을 눈치채고 방어 체제를 구축하면서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IBM 제국을 추스르기 위해 18개월을 주기로 주력 상품을 교체하는 밸리의 게임에 동참하지만, 존 에이커스에 이어 경영권을 인계받은 루이스 거스트너(Louis Gerstner)가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 빅 블루 IBM사의 이미지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곧이어 터진 월 스트리트의 두 번째 폭격은 IBM사에게 단일 기업으로서는 사상 최고치인 7,500억 달러의 주식 손실을 안겨주면서 더 이상 사업을 추진할 가치가 없는 기업으로 낙인찍고 만다.
한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IBM사에 무슨 일이 있나?"라는 풍문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IBM 직원들에게 현실로 들이닥쳤고, IBM사의 주력 사업 지대인 뉴욕 주의 허드슨 밸리(Hudson Valley)는 브로드웨이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무대보다 훨씬 생생한 무대를 각본 없이 연출하고 있었다. IBM사의 주가가 사상 최대치로 폭락하던 90년대 초, IBM 제국의 신화를 탄생시킨 토머스 웟슨 주니어는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IBM사는 반드시 컴백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하지만, 운명의 반전은 더 이상 현재 진행형이 아니었다. 밸리의 변경이 극에 달하던 1993년, 실리콘 밸리는 윈텔 제국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었으며, 이 새로운 제국의 실세로 등장한 두 명의 워리어인 빌 게이츠와 앤디 그루브의 사전에 '데탕트'라는 단어는 없었다.
Episode 33. IBM사의 운영체제 헌팅 : 하늘에서 운명이 바뀐 사나이
에드 로버츠의 미츠사(MITS)와 베이식 언어 분쟁을 슬기롭게 극복한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다. 초창기 실리콘 밸리에 비친 빌 게이츠의 이미지는 컴퓨터 언어 시장의 신동 내지는 마술사였다. 80년대 초반 퍼스널 컴퓨터가 일반 사용자들을 상대로 그 시앙을 확대해 나가고 있을 무렵, 소프트웨어 시장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게리 킬달의 디지털리서치사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암암리에 형성된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빌 게이츠에겐 언어 시장을, 그리고 게리 킬달에게는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상호 불침법의 이해 관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게리 킬달은 디지털리서치사에 언어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 있으며 MS사를 소개시켜 줬고, 빌 게이츠 또한 운영체제가 필요한 고객을 만나면 바로 디지털리서치사의 CP/M을 언급해 주었다.
소프트웨어 시장이 아직은 독립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80년대 초반까지는 빌 게이츠는 결코 운영체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IBM사에게 조차 비교적 메모리를 많이 잡아먹는 운영체제의 도입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내부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PC 시장에서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한 애플과 코모도어 기종들은 모두 운영체제를 탑재하지 않은 상태로 시장에 선보였으며, IBM PC의 실질적 소비층을 일반 사용자로 맞춘 이상 IBM사가 염두에 둔 PC의 운영체제는 필수 조건이라기보다 선택에 가까웠고, 그들은 운영체제 없이도 PC를 판매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소프트웨어 시장은 아직 하드웨어와 결합된 틈새 시장에 불과했고, 빌 게이츠조차 언어 분야의 소프트웨어가 운영체제 분야를 압도할 것이라 점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게이츠는 IBM사의 어콘 프로젝트의 운영체제 담당자인 잭 샘스(Jack Sams)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잭 샘스는 빌 게이츠에게 IBM사가 현재 PC를 제작하고 있다는 언급 없이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품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표현과 함께 비즈니스 미팅을 제안한다. 당시 IBM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갑(甲)의 위치에게 모든 미팅을 주관해 온 컴퓨터 시장의 대표 기업이었고, MS사는 빌 게이츠 자신을 포함해 총 직원이 서른 명을 약간 밑도는 규모의 영세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IBM사가 미팅을 제안했다는 사실 자체가 MS와 같은 영세 기업으로서는 영광이라고 볼 수 있지만, 빌 게이츠는 샘스의 예상을 뒤엎고 2주 후에나 미팅이 가능하다고 거드름을 피우게 된다. 물론 샘스는 빌 게이츠와 통화한 바로 다음 날 워싱턴 주의 밸라브 시로 날아가게 되며, 여기서부터 IBM사는 MS사와의 끈질긴 악연에 테이프를 끊게 되고, 빌 게이츠는 자신을 세계에게 가장 부자로 만들어주게 될 꿈의 소프트웨어인 도스 운영체제를 발견(?)하게 된다. 잭 샘스와 빌 게이츠의 첫번째 만남은 간단한 상견례 절차를 거친 후 끝이 났지만,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오늘날 MS사의 아성을 건설하는 초석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잭 샘스와 빌 게이츠의 두 번째 만남은 한 달 후인 1980년 8월에 이루어진다. 이 자리에서 샘스는 "인텔 프로세서 전용 운영체제를 우리에게 판매할 용의가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돌발 상황을 연출하지만, 빌 게이츠는 "당신들이 운영체제를 원한다면 번지를 잘못 택했다. 운영체제는 실리콘 밸리에 소재한 디지털리서치사에서 제작하고 있으며, 원한다면 그쪽 담당자를 주선해 주겠다."라는 간단한 말로 답하고 만다. 빌 게이츠는 그 자리에서 디지털리서치사의 담당자와 통화한 후, 바로 다음 날 샌타크루즈 해변에 위치한 퍼시픽그루브 시로 잭 샘스를 출발시킨다. 당시 빌 게이츠는 운영체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며, 게리 킬달의 운영체제가 자신의 베이식 언어보다 상업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IBM사가 제시한 세기의 오퍼를 빌 게이츠가 간단히 거부함으로써 이제 행운의 화살은 게리 킬달의 CP/M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컬한 면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잭 샘스가 금세기 최고의 사건으로 진화될 IBM PC의 운영체제 계약을 디지털리서치사와 맺기 위해 먼 길을 날아 퍼시픽그루브 시에 도착했을 때, 게리 킬달은 자신이 새로 구입한 경비행기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 날 잭 샘스가 디지털리서치사의 대표 자격으로 대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운영체제의 기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킬달의 아내뿐이었고, 여기서 도로시 킬달은 IBM사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만다.
잭 샘스는 운영체제 계약의 조건으로 IBM사가 제시하는 비공개 문서(Nondisclosure Agreement)에 사인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디지털리서치사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약관으로 구성된 이 계약서를 현직 변호사인 도로시 킬달이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IBM사가 요구한 비공개 문서는 IBM사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약관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당시 IBM사가 얼마나 우월한 위치에서 사업 계약을 체결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잭 샘스가 제시한 비공개 문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IBM사는 디지털리서치와의 계약에서 얻는 모든 정보를 누구에게나 공개할 수 있지만, 디지털리서치사는 IBM에서 제공하는 어떤 정보도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없으며, 만약 이 약관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적절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매우 공격적이고 불공평한 계약 조건이었다.
도로시 킬달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킬달 부부는 벌써 CP/M 운영체제의 성공적인 판매로 실리콘 밸리의 백만장자 대열에 올라서 있었고, IBM사의 불합리하고 위험성 있는 계약을 통하지 않고서도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부를 축적해 놓고 있었다. 게리 킬달은 잭 샘스의 IBM 진영과 얼굴 한 번 대면한 적 없이 자신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때 제3자들에 의해 결정나 버린 자신의 운명을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게리 킬달이 디지털리서치사로 복귀했을 때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 있었고, 잭 샘스는 IBM PC의 운영체제 문제를 원점으로 복쉬시킨 채 아무런 소득 없이 동부의 플로리다 보카시로 날아가버린 후였다.
Episode 34.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QDOS)
동부의 플로리다 보카시로 복귀한 샘스는 무의미했던 운영체제 헌팅 출장 결과를 어콘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빌 로웨(Bill Lowe)에게 보고한다. 이후 이들은 IBM PC의 생존 여부를 판가름하게 될, 뉴욕 본사의 중역들을 상대로 진행된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된다. 뉴욕 본사에서 진행된 어콘 프로제그의 프레젠테이션은 IBM PC의 프로토 타입을 중심으로 운영체제는 없지만 당시의 PC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선명한 그래픽을 선보이면서 무난하게 진행됐다. IBM사 중역들은 아직 PC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일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이 자사의 매출에 그다지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IBM PC는 본사의 덤덤한 반응 속에서 출시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문제는 운영체제에 있었다. 빌 로웨와 잭 샘스는 어콘 프로젝트에 운영체제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PC 시장에 IBM사가 차별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운영체제를 접목시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개량형 PC를 선보이는 길 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인텔 프로세서에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운영체제는 게리 킬달의 CP/M이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잭 샘스는 게리 킬달을 자신의 요구 조건으로 설득시키는 길만이 IBM PC의 출하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콘 프로젝트의 피날레를 장식할 운영체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왔다. 게리 킬달과 IBM사의 비공개 문서 사건을 접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일급 참모인 폴 앨런, 스티브 발머, 그리고 케이 니시(Kay Nishi)를 한 자리에 불러놓고, 운영체제 사업에 뛰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게 된다. 당시 MS사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프로그래머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MS사가 운영체제 시장에 뛰어든다는 사실은 게리 킬달의 디지털리서치로 하여금 언어 프로그램 시장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소프트웨어가 돈이 되지 않는 세상에 서로 헐뜯는 길은 자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니시의 강력한 설득을 시작으로 빌 게이츠와 앨런은 운영체제 시장에 뛰어드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하지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라는 속담처럼, MS사는 PC용 운영체제가 없음은 물론 이를 제작할 능력조차 없는 소규모 기업에 불과했다. IBM사는 적어도 두 달 이내에 안정적인 운영체제가 필요했고, 빌 게이츠가 CP/M과 대등한 운영체제를 제작하려면 적어도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서 빌 게이츠의 천운(天運)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과 빌 게이츠의 차이는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일반 아마추어들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즐길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비즈니스가 우선이었다. 미츠사와 베이식 언어의 소유권 문제가 대부되었을 때도 빌 게이츠는 대부분의 아마추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법적 대응이라는 절차를 거쳐 자신의 자산을 지켰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빌 게이츠의 오른팔격인 폴 앨런은 시애틀 시 근교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의 동호회를 수소문한 후, 훗날 MS-DOS와 윈도로 거듭나게 될 큐도스(QDOS : Quick & Dirty Operating System)를 발견하게 된다.
팀 패터슨(Tim Paterson)이란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제작한 큐도스는 바로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가 지닌 대부분의 기능들을 보유한 잭 샘스가 찾던 완벽한 대안이었다. 문제는 이 큐도스란 운영체제가 현실적으로 게리 킬달의 코드를 무단으로 도용한 CP/M 클론이라는 것이었지만, 당시 소프트웨어의 지적 재산권 조항 또한 게리 킬달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고, 디지털리서치사 또한 사활을 걸고 CP/M을 사수할 생각이 없었다. 빌 게이츠는 바로 잭 샘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운영체제를 확보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로써 IBM사의 역사적인 운영체제 헌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만다.
잭 샘스가 운영체제를 계약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사항은 MS사와 IBM사 가운데 어느 쪽이 큐도스의 소유권을 갖느냐는 것이었는데, IBM사는 빌 게이츠에게 선뜻 큐도스의 모든 법적 소유권을 넘기고 마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당시 IBM사가 운영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PC라는 하드웨어에 물려 있는 하찮은 소프트웨어에 불과한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운영체제의 소유권을 MS사에게 줌으로써 큐도스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빌 게이츠에게 떠넘기려는 속셈도 있었다.
빌 게이츠는 7만 5,000달러에 팀 패터슨의 큐도스 소유권을 사들이게 되고, 정확히 13년 후 MS사는 영원한 제국으로 남을 것처럼 보였던 빅 블루 IBM사를 격침시키고 만다. 지난 15년간 IBM사는 7만 5,000달러에 빼앗긴 큐도스의 소유권을 만회하려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빌 게이츠를 잡을 방법은 이 세상에 없었다. 단돈 7만 5,000달러에 빌 게이츠의 수중에 들어와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Quick & Dirty OS)'란 비천한 이름에서 금세기 최고의 소프트웨어인 윈도 시리즈로 승화하게 된 MS-DOS는 지금부터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지켜야 할 보배로 떠오르게 된다.
Episode 35. 'CP/M 86'이란 운영체제가 있었으니...
'급조된 더러운 운영체제'란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단돈 7만 5,000달러에 빌 게이츠의 수중에 들어가 큐도스(Q-DOS: Quick & Dirsty OS)는 IBM사의 파격적인 PC 캠페인의 주역으로 동승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일반 사용자들에게 '운영체제'라는 생소한 용어를 보편화시키기 시작한다. 수퍼맨에 버금가는 미국적 캐릭터인 찰리 채플린을 전면에 내세운 IBM사의 홍보 전략과 지난 반세기 동안 닦아온 물샐 틈 없는 유통망은 IBM PC를 출시 1년 만에 전체 PC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T-렉스(티라노사우루스)로 돌변시켜 버렸고, 애플사를 주축으로 한 기존의 PC 제조업체들은 눈치 빠른 밸로서랩터의 무리들로 둔갑해 버리고 만다.
데뷔 첫 해인 1981년부터 급속도로 PC 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한 BIM사는 이듬해, 오늘날 디지털 혁명 내지는 사무자동화란 개념을 현실로 승화시키게 될 미치 카포의 '로터스 1-2-3'를 만나게 된다. 이 순간부터 IBM사의 PC는 일반 사용자들은 물론 정부기관과 기업으로까지 폭발적인 속도록 확산되면서, 기존에 주류로 분류되던 애플사, 코모도어사, 그리고 탠디사의 PC를 IBM사가 미치지 못하는 틈새 시장에서만 생존하는 비주류 PC로 전락시키고 만다. IBM PC의 출현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PC 시장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는 소수의 프로그래머들과 게임 마니아들을 주축으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라는 매체가 전자식 타자기와 미니 컴퓨터의 스프레드시트보다 우수하거나 적어도 대등한 개념의 디지털 미디엄으로 정착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주먹구구식 매매 형식을 탈피하지 못한 원시적인 PC 시장에 IBM사의 대자본이 진출하면서, 지극히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일반 사용자들을 주소비층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시애틀 컴퓨터사로부터 사들인 큐도스의 명칭은 빅 블루 IBM사에게는 'PC-도스'란 이름으로 IBM PC의 하드웨어(본체)에 번들로 판매되었으며, IBM사를 제외한 모든 클론 PC 업체들에는 'MS-도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이로써 PC 시장의 일개 영세 업체에 불과하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도스(Disk Operating System)라 불리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명사로서 보통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업 기반은 PC 시장의 운영체제보다는 전문 프로그래머들을 위한 언어 시장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당시 운영체제의 현실적 1인자의 위치는 누가 뭐래도 CP/M을 탄생시킨 게리 킬달의 몫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빌 게이츠라는 인물이 단 한 명의 전담 프로그래머도 없이 게리 킬달이 제작한 CP/M 운영체제의 변종에 불과한 족보도 알 수 없는 정체 불명의 운영체제의 판권을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마무리 코딩 작업에 들어가 있는 CP/M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CP/M 86'이란 운영체제가 PC 시장을 석권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으며, 상술 좋게 선수를 친 빌 게이츠의 MS-도스에는 그리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게리 킬달은 IBM PC에 번들로 판매되고 있는 도스라는 이름의 운영체제가 자신의 CP/M 운영체제의 코드를 도용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팀 패터슨이 운영하던 시애틀컴퓨터사와도 빌 게이츠보다 훨씬 먼저 친분 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팀 패터슨은 자신의 큐도스가 IBM PC에 번들로 판매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빌 게이츠에게 판권을 넘기고 말았다). 사실 빌 게이츠와 게리 킬달은 이 역사적인 큐도스 운영체제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만 해도 경쟁 회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호 신뢰의 공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 시에서 자신들의 사업 기반을 워싱턴 주의 밸라뷰 시로 이전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할 당시, 게리 킬달은 동종 산업에 종사하는 동료이자 고향 선배의 입장에서 소프트웨어 시장의 전반적인 흐름을 조언할 정도로 이들의 친분 관계를 각별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운영체제 시장의 규모가 IBM PC의 출현으로 뜻밖의 국면을 맞게 되자. 디지털리서치사 또한 더 이상 수동적 위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을 관망할 수만은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리서치사의 지휘관인 게리 킬달은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로 간주되는 '리카도의 두 가지 재능'을 모두 갖춘 인물이 결코 아니었으며, 특히 사업가적 자질면에서는 하루 아침에 동맹 관계에서 경쟁 관계로 탈바꿈한 빌 게이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이츠와 킬달 사이에 암암리에 구축되어 있던 모종의 불침범 이해 관계는 빌 게이츠의 돌발적인 침공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며, 순수한 엔지니어에 불과하던 게리 킬달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빌 게이츠에 대한 모든 신뢰를 상실하고 만다. 악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전개된 빌 게이츠와 게리 킬달의 관계는 이렇게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되고, 디지털리서치사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인 IBM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과론적 입장에서 볼 때, IBM사가 PC 운영체제를 헌팅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에서 도의적으로 무리를 일으켰으며, 또 누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디지털리서치사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했는지는 당시 소프트웨어 산업의 분위기로 봐서 판가름하기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업가보다는 엔지니어에 가까웠던 게리 킬달로 더욱 우수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면 사용자들이 자신의 운영체제를 택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과 함께 자신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 IBM사, 그리고 시애틀컴퓨터사에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킬달은 자신의 프로그래머적 능력을 누구보다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운영체제 분야에서만은 부동의 1인자임을 자부하던 그가 시장에 새롭게 내놓은 CP/M 86은 모든 면에서 MS도스의 기능을 압도하는 우수한 운영체제로 인정받게 된다. 빅 블루 IBM사 역시 까다로운 조건 없이 디지털리서치사와 CP/M 86 운영체제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게리 킬달은 실리콘 밸리에서 자신의 입지를 궁극적으로 앗아가게 될 IBM사와의 뒤늦은 계약으로, 마치 디지털리서치사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제치고 운영체제 시장의 새로운 표준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올랐지만, 막상 PC 시장에 선보인 CP/M 86 버전을 찾는 사용자들은 거의 없었다.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 게리 킬달의 CP/M 86이 당시 번들로 판매되던 MS-도스와 비교해 기능면에서 차별성을 지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당시 일반 사용자들이 운영체제의 성능에 관한 변별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에는 PC 시장의 역사가 너무나 짧았다. CP/M의 궁극적 종말은 IBM사의 가격 책정에서 비롯되었다.
게리 킬달은 빌 게이츠와는 대조적으로 IBM사와의 거의 대등한 조건으로 CP/M 운영체제의 라이선스를 추진하였다. 아울러 IBM사의 반대를 무릅쓰며 자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CP/M이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번들로 판매될 것을 끝까지 고수하는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작 CP/M의 가격 책정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전적으로 IBM사에게 일임하는 절대절명의 실수를 범하고 만다.
IBM사가 디지털리서치사에게 치명적으로 불공평한 가격 책정을 단행하면서 CP/M 86 버전을 PC 시장에 내놓은 정확한 이유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 40달러에 판매되는 MS-도스와 무려 다섯 배에 달하는 200달러에 판매되는 CP/M 86 운영체제 사싱에서 양자택일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디지털리서치사도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능을 보유한 CP/M 86 버전이 MS-도스에 비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될 것으로 예측은 했지만, 다섯 배나 높은 가격은 이 세상의 어떤 소프트웨어도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CP/M 86에 대한 가격 결정권은 전적으로 IBM사에 달려 있었고, IBM사가 의도적으로 CP/M 86 버전을 PC 시장에서 사장시켰다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조치일뿐더러, IBM사가 CP/M 86을 전략 차원에서 파괴했다 해도 약육강식의 잔혹한 게임의 법칙이 정석으로 간주되는 실리콘 밸리의 먹이 사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경영 전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붕괴시켜 버린 IBM사의 고의성(?)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겠지만, 게리 킬달은 여기서 또다시 후퇴하는 소극성을 보이면서 실리콘 밸리의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영을 수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