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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yrus/Digging in the Dirt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Episode 6 - 10

Episode 6. 노이스의 스톡옵션 파동

1957년 지구 반대편에서 대기권을 향해 솟아오른 한 대의 로켓은 페어차일드사는 물론 트랜지스터라는 개념 자체의 가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8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탄생된 페어차일드사는 실리콘이란 소재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 최초의 회사이기는 했지만 트랜지스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 유일한 회사는 아니었다. 달라스에 위치한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피닉스에 위치한 모토롤라, 보스턴의 트랜지스톤(Transitron)과 레이디온(Raytheon) 등도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트랜지스터의 상용화에 온갖 정열을 쏟아붓고 있었다. 당시의 트랜지스터 산업은 정교한 접합 기술이 요구되는 정밀산업이었지만, 페어차일드사는 오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트랜지스터를 생산해 냈다.

사실 페어차일드의 생산 공정은 100퍼센트 수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며, 실리콘의 접합과정이나 도핑(불순물을 첨가하는 과정)의 정확성에 따라, 크게는 총 생산량의 90퍼센트가 불량품으로 돌변해버렸다. 이렇듯 비생산적인 수작업 과정은 고스란히 트랜지스터의 가격을 인상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노이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획기적인 기술인 집적 회로 또는 IC(Integrated Circuit) 방식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개념은 정확히 10년 후 그가 창립하게 될 인텔사의 "메모리칩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된다. 1959년 노이스가 집적 회로의 개념을 탄생시킬 무렵, 트랜지스터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윌리엄 쇼클리와 8인의 배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집적 회로의 실질적인 창안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의 잭 킬비(Jack Kilby)라는 엔지니어였는데, 그는 페어차일드사의 노이스보다 6개월 앞서 집적 회로 방식으로 IC 칩을 독자적으로 선보였다. 그러나 킬비의 집적 회르는 게르마늄 소재를 이용한 제품이었고, 노이스와 호어니가 6개월 후 탄생시킨 실리콘 소재의 집적 회로 방식은 게르마늄 소재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며 우수한 생산성을 입증하면서, 페어차일드사의 IC 칩 제품은 반도체 시장의 부동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페어차일드사의 집적 회로 칩은 마이크로칩이란 명칭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며, 에디슨의 전구와 리 디 포레스트(Lee De Forest)의 진공관이 해낼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을 일반 테크놀로지가 아닌 '하이-테크놀로지'라는 이름으로 해결하게 됨으로써, 8인의 배신자들은 뉴욕의 페어차일드 본사로부터 경영권을 인계해 달라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게 된다.

시작부터 페어차일드사는 8인의 배신자들을 위한 조직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뿔뿔이 각자의 행보를 결정하게 될 이들에게 본사의 경영권 인수는 앞으로 이루어질 페어차일드사의 스핀오프에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며, 이들에게는 당시 시세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 25만 상당의 스톡옵션이 주어진다. 뉴욕 본사의 실질적인 경영권 인수는 마이크로칩의 대량 생산을 의미하며, 페어차일드사는 HP와 함께 본격적으로 모래알을 황금알로 전화시키기 시작한다. 60년대 노이스의 페어차일드(뉴욕 본사는 페어차일드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노이스를 월급쟁이 사장으로 임명한다)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계획하는 스페이스 프로그램에 적용되는 마이크로칩을 공급하게 되는데, 노이스의 IC 칩은 에니악(ENIAC)보다 3천 배나 작은 모습으로 제미니호의 내부에 컴퓨터를 장착시키게 되고,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선장인 닐 암스트롱으로 하여금 인간의 첫 발자국을 남기는 역사적인 업적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페어차일드사의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8인의 배신자들의 큰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공간이었다. 보수적인 뉴욕 본사의 경영스타일은 프리 스타일을 추구하는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에게는 족쇄로 작용했고, 반도체의 기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동부의 관료들에게 모든 중요한 결정권을 빼앗긴 8인의 배신자들은 서로 각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페어차일드사의 전설적인 스핀오프로 알려지게 된다.

1968년 노이스는 페어차일드사의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제공하자는 자신의 제안이 거절되자 8인의 배신자들 중 마지막으로 고든 무어와 함께, 인텔사를 설립하면서 스핀오프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다. 특히 마지막 페어칠드런으로 알려진 노이스와 무어는 첫 번째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자금줄을 대준 아서 록을 다시 찾아가게 되는데, 이들은 단 하루(정확히 전화 두 통으로)만에 인텔사의 설립에 필요한 벤처 자금을 조달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노이스와 무어의 독립적인 행보는 제2의 쿠데타를 이끌 인텔사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노이스는 인텔사의 창립 후 첫 번째로 "전 사원(화장실 청소부터 사장인 자신까지)의 스톡옵션 제도"를 주창했다.

모든 이가 소유한 우리의 회사라는 슬로건과 함께, 회사의 성공으로 생성된 부의 분대를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표출해 낸 최초의 조직으로 성장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노이스의 파격적인 정책은 모든 벤처리스트들에 의해 복제되어 오늘날 실리콘 밸리들의 백만장자들은 거의 모두가 스톡옵션이라는 매우 특이한 제도에 의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거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Episode 7. 팽창하는 밸리와 디지털 경제의 태동

60년대의 역사는 캘리포이나 북쪽에 위치한 작은 밸리에서 펼쳐진 디지털 문화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다. 아니,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올리브 스톤이 60년대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추진한 대표적인 시네마 사가(Cinema Saga) 프로젝트인 <플래툰>, <7월 4일>, <JFK>와 같은 영화들은 가장 실감나게 60년대를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정작 그 시대의 어떠한 사건보다도 인류의 역사를 저 밑바닥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한 실리콘 밸리의 탄생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의 기억이 옳다면 아직까지 실리콘 밸리의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는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실리콘 밸리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누가 뭐라 해도 세상은 철강, 자동차, 건설과 같은 인프라스트럭처 위주의 1차 산업의 막강한 파워 아래 영원히 돌아갈 것처럼 보였고, 컴퓨터란 개인이 갖기에는 지극히 브루주아적인 물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클리와 노이스를 주축으로 하여 발명된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르는 기존의 테크놀로지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대중 문화에 접목되기 시작했다. 즉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메모리칩 등의 반도체 상품들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와 같은 하나의 완성품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요리의 근간이 되는 쌀이나 콩과 같은 존재로서, 세상을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수동적인 아날로그 세상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디지털 세계로의 창조, 우리는 그것을 디지털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디지털 혁명의 파워는 가히 가공할만한 위력을 과시했다. 30년 전 빌딩 한 채 값과 맞먹었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일단 PC의 10분의 1의 성능에도 미치지 못했던 더미 제품으로 전락시켜 버렸는가 하면, 경제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했다. 즉 '보다 좋은 상품을 보다 싸게 산다'라는 사기꾼적인 발상을 보편적인 상식으로 입증시켜 준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고급 상품에는 프리미엄이라는 이름 하에 중저가 상품보다는 현저하게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는 '성능이 향상될수록 가격은 떨어진다'는 새로운 경제 원리를 탄생시켰다.


Episode 8. '무어의 법칙'이 밸리를 지배한다.

컴퓨터 업체의 대명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빅 블루(Big Blue)' IBM사가 퍼스널 컴퓨터 시작에 뛰어든 것인 PC 시장의 외형 규모가 1천만 달러는 넘기 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이다. IBM은 PC 시장 진출과 동시에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각종 매스컴을 총동원하여 IBM PC의 대대적인 'PC 캠페인'에 나섰고, 이즈음부터 IBM사의 상표가 붙지 않는 모든 PC들에게는 '클론(복제품)'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반인들로 하여금 IBM사가 마치 PC의 역사를 주도해온 일등공신인 것처럼 오판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편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창립 5년만에 장난감 모형이 아닌 진짜 F-16 전투기의 성능에 버금가는 '알테어'라는 막강한 도구를 일반 가정의 안방에 들여놓게 만들었다. 비로소 IBM은 인텔을 과소평가 했음을 깨닫게 된다. IBM이 인텔을, 아니 실리콘 밸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잔챙이 기업에 불과했던 실리콘 기업들을 쓸어낼 수 있는 파워(자금력)가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 IBM의 매출액은 개발도상국의 일년 예산을 초과할 정도였으니 그러한 자만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둘째, IBM은 실리콘 상품이 지니고 있는 진짜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즉, 무어의 법칙에 의해 디지털 경제의 신개념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더글러스사와 보잉사가 그랬듯이, IBM사는 한 대의 메인프레임을 통해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의 이윤을 거둬들였고, 지속되는 애프터서비스와 업그레이드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불황을 모르는 슈퍼 비즈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는 'IBM이 60년대 말을 기점으로 형성된 실리콘 밸리의 괴력에 무릎을 꿇었다'고 말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량생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상품이다. 실리콘이란 자원는 오일이나 석탄과는 다른 무제한성의 특징을 지닌다. 즉 물과 공기처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자원이다. 하지만 60년대 말 대기업들의 상식으로 볼 때 인텔사의 작은 집적회로 트랜지스터는 단순히 기술혁신에 불과할 뿐, 그 누구도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이스와 무어만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이들의 소신은 불과 20년만에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디지털 혁명을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반도체라는 사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앞서 일정시간 동안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어야하는 자금집약적인 산업이며, 상품의 성공적인 출하를 전재로 모든 주변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야만 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즉, 막대한 자금을 들여 추진한 테크놀로지가 막판에서 양산불가라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관련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올스톱되는 위험천만한 산업이 바로 노이스가 창출해낸 실리콘 산업이다. 노이스는 주변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인텔사의 생존을 건 대량 생산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경쟁 기업들의 관행과는 무관하게 가격은 내리고 생산량은 높여 가는 파격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노이스의 이러한 '볼륨 정책'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일본의 메모리칩 양산체제에 밀려 메모리 분야를 영원히 포기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결국, 18개월을 주기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트랜지스터 밀도는 2배로 증가하게 되고,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무어의 법칙은'은 샐리콘 산업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던져준다.


Episode 9. 유태인 1.5세 앤디 그루브 인텔에 입사하다.

노이스와 무어가 설립한 인텔이라는 작은 회사는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던 모든 엔지니어들에게는 선망의 일터였다. 당시 그들의 명성은 휴렛과 팩커드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꿈의 테크놀로지로 불리는 집적회로의 아버지인 노이스와, '무어의 법칙'의 창시자인 무어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엔지니어들의 이력서가 인텔사의 창립 소식과 더불어 이들의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이게 된다. 하지만 노이스는 페어차일드사에서 인연을 맺은 앤디 그루브를 총괄 매니저로 들여앉힘으로써 실리콘 제국을 향한 첫 단추를 완벽하게 끼우게 된다. 앤디 그루브를 헝가리 태생의 유태인 이미 1.5세로,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나치 치하에서 생존을 위한 도피생활을 전전하다가, 전후 사회주의화된 헝가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자신의 과거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는 안드라스 그로프(Andras Grof)라는 헝가리 본명을 앤디 그루브라는 미국명으로 개화하면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뉴저지의 빈민가에서 이민 초기의 어려운 생황을 시작한 그루브는,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뉴욕 주립대 화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의 버클리 캠퍼스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이후 그루브는 페어차일드사의 R&D 부서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이 부서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고든 무어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노이스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한 사람이다. 솔직히 앤디 그루브라는 인물을 기업의 일반적인 인사 관행에서 본다면, 인텔사의 경영을 총책임질 만한 매니저감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노이스는 과거의 환상적인 영업실적보다는 트랜지스터 테크놀로지를 이해할 줄 알고, 창의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는 엔지니어적인 능력을 매니저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페어차일드 시절, 실리콘의 S자도 모르는 동부의 관료들과 소모적인 말싸움을 끝없이 벌여야 했던 노이스에겐 앤디 그루브야말로 최적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앤디 그루브는 노이스의 기대에 부응하여 지난 30년 동안 인텔사의 경영 일선에서 항상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어떤 경쟁 기업보다는 한 걸음 앞서 상품화시켰으며, 노이스와 무어가 꿈꿔온 실리콘 혁명을 최선선에서 진두지휘했다. 그 공적을 널리 인정받아 인텔사에 입사한 지 30년째인 1997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게 된다.


Episode 10. 메모리칩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60년대 지적재산권에 대한 실리콘 밸리의 일반화된 상식은, 누구든 먼저 상품을 선보이면 그것으로 지적소유권이 인정되는 분위기였고, 크로스 플랫폼 라이선스에 관한 법적 조항 역시 상품의 제작 시 상호 특허권을 도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한 애매모호한 법률들이 많았다. 이에 지난 30년 동안 실리콘 밸리에서는 특허권에 대한 법정 시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것이 엔지니어들 못지 않게 이곳 실리콘 밸리를 변호사들의 천국으로 탈바꿈시켜놓았다. 실리콘 밸리는 일반 제조 산업에 비해 법의 잣대에 의해 회사의 명암이 갈라지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빈번한 편이다. 1968년 인텔사는 두 가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들을 따르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설립한 직후 노이스와 무어가 바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반도체 상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생산되는 IC 제품들은 페어차일드를 비롯한 여러 반도체 회사들이 벌써 양산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텔사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무리 우수한 IC 제품을 생산해 낸다해도, 볼륨 싸움에서 인텔은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결국 노이스와 무어는 기존의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상품을 창출해 내야만 했는데, 이 때 그들이 선택한 상품이 바로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메모리칩이었다. 노이스가 발명한 집적회로 테크놀로지는 사칙 연산을 요구하는 일반 로직 칩으로만 상용화되어 있었을 뿐, 컴퓨터 시장은 아직도 비효율적인 자심(Maganetic Core) 기억장치를 표준 메모리 테크놀로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심 기억장치는 제조하기 쉽다는 장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장점도 없는 골칫거리였다. 인텔은 메모리칩을 전략 상품으로 선정한 후, 고든 무어의 지휘 아래 첫 번째 프로토 타입의 제작에 모든 역량을 쏟게 된다.

노이스와 무어는 시간이 없었다. 인텔에게 시간은 곧 돈을 의미했고, 한시라도 빨리 이윤을 창출해내지 못하면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으로 유치할 수 있는 자금도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인텔이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형 경쟁업체들과 비교한다면 이들의 인력이나 자본은 양의 경쟁에서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 고든 무어에게는 프레데릭 파긴이라는 비밀병기가 있었다. 이태리 출신의 교환 연구원이었던 파긴은 인텔의 비전에 미료된 영주권을 취득, 인텔사로 자리를 옮겨 테드 호프, 조엘 카프와 함께 역사적인 DRAM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상품화 과정에서 현격한 공을 세운 인텔의 레인메이커이다. 조엘 카프의 1102 칩을 첫 번째 상품으로 생존의 기반을 닦은 인텔은, 테드 호프가 고안해 낸 새로운 개념의 DRAM 방식을 채택한 1103 칩을 히트시키면서 메모리칩 관련 분야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메모리 상품의 성공은 반도체 시장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천상륙작전과도 같았으며, 이후 노이스와 무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상품화로 대세를 굳히게 된다. 1103 메모리칩의 상업적 성공은 인텔사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 시점부터 인텔사는 무어의 법칙에 준하여 거침없는 기술 혁신을 일궈내 80년대 후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함께 '윈텔 제국'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인텔사를 윈텔 제국으로 탄생시킨 일등 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마이크로프로세서였으며, 고든 무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품평회 자리에서 "인텔의 4004 칩은 인간이 창안해 낸 상품들 중 가장 혁명적인 상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의 상징으로 굳어진 X86 시리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노이스와 무어의 참모진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진 메모리칩 프로젝트들과는 달리, 일본의 한 전자 계산기 제조업체가 청탁한 집적회로 로직 칩 세트의 상품화 과정에서 테드 호프가 구상한 서브루틴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부시콤이라는 일본 기업이 인텔에게 데스크톱 전자 계산기에 필요한 8개의 독립적인 로직 칩의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창립한지 3년도 안된 인텔이 8개의 독자적인 로직 칩을 디자인 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드 호프는 DRAM의 기적에 이어 또 한번 해결사로 나서게 된다.

즉, 그는 부시콤의 엔지니어들에게 8개의 독립적인 로직 칩을 디자인하는 대신, 서브루틴(Subroutine)이라는 기능을 이용해 8개의 칩 기능을 하나의 칩에 응집시킨 다목적 로직 칩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는 즉흥적으로 이 새로운 칩에 포함될 램, 롬, I/O 장치 그리고 메인 프로세서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천재성을 발휘하는데, 노이스와 무어는 물론 일본 부시콤의 담당 엔지니어였던 시마에게도 이론상 전혀 하자가 없다는 확신을 받아낸다. 그러나 여기서 인텔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맛보는 운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인텔의 기업 모토는 "인텔은 배달한다(Intel Delivers.)"였다. 즉, 인텔은 어떤 난관을 뚫고서라도 상품을 적기에 공급하는 신용도가 최대 강점인 회사였다.

그런데 테드 호프가 약속한 다목적 로직 칩의 진행과정을 점검하러 출장 나온 부시콤사의 시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칩의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마의 출장을 관장한 파긴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지금부터라도 칩 디자인에 착수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인텔의 신용도에 치명타를 안겨준 이 프로젝트는 결국 파긴의 통제하에 원점에서 다시 진행되고, 파긴은 테드 호프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발휘하며 3개월만에 완벽한 프로토 타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3개월이라는 시간은 부시콤의 경쟁 업체로 하여금 경쟁 상품을 우선적으로 시장에 선보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인텔사는 계약 위반의 책임을 물어 계약 조건을 부시콤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수정하게 된다.

노이스는 이 과정에서 금전적인 모든 손해는 감수하지만, 기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던 다목적 로직 칩의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을 부시콤사에서 인텔사로 이전하게 되는데, 만약 이때 노이스가 이 칩의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로서의 인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테드 호프가 계획대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면 인텔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인의 소유권을 태평양 건너 섬나라에 넘겨주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