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형일 : UC 샌디에고 경제학과 졸업, 매킨토시 사용경력 10년째인 컬럼니스트
가상현실과 현실, 꿈과 현실의 모호성
변하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진보라는 가치 하에 '미래는 이런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그리고 변화의 모든 장점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이론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보수는 과거의 진보였으며, 과거의 보수는 존재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잊혀져 버렸다. 그렇듯 운명의 사이클은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프레임 속에서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VR은 Virtual Reality, 즉 가상현실의 영어 약어이다. 디지털 문화가 20세기가 낳은 최대의 혁명(혼돈)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가상현실, 즉 사이버 스페이스가 또다른 현실이냐?'라는 쟁점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디지털리즘을 받아들이는 모든 네티즌은 또 다른 현실에서 또 다른 자아를 갖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꿈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것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과 꿈이 서로 실질적인 연계성과 연속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이 무너지는 가상현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자. 시간이 꿈이나 현실에서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면, 프로이드가 말하는 꿈이나 옆집 순이가 당신에게 팔려는 꿈이나 똑같이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리즘이 구축해 놓은 사이버 스페이스는 엄연한 현실이며, 이것을 또 다른 현실, 즉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은 기존 현실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보다 풍부한 삶을 영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스페이스가 제2의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먼저 존재의 정통성이 부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당신이 진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당신은 분명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낸다'라면 존재의 실제를 알릴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 여부를 알리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실질적인 문제는 자신이 '진짜 자신'이냐는 것이고, 이것을 증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실제 현실에서 그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영원히 만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상대방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오묘한 이유는 존재가 단수의 개념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존재의 투명성
사이버 스페이스가 보편화되어지면, 인터렉티브라는 개념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상호 교환의 개념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인터렉티브'하다는 표현은 두 명 이상의 존재가 실제 현실인 제1의 현실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제2의 현실을 통해 사고를 공유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 스페이스가 독특한 문화를 내포한 거대한 공간으로 팽창하게 된다면 (10년 후의 인터넷을 상상해 보라!) 위헤서 필자가 언급했듯히 존재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거대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육체적인 만남이 필요 없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만남은 유일무이한 존재의 독립성조차 가상본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만약 당신의 5개의 E-메일 주소와 5개의 ID를 보유하고 있다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인터렉티브한 삶을 살 수 있다. 매킨토시 시스템의 멀티파인더와 윈도우의 멀티태스킹이 드디어 그 위력을 발휘해 사이버 스페이스의 존재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은 Look & Feel이라는 GUI의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는 신호탄이 아닐까?
그리고 당신은 상대방을 의심하며 이같은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당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실로 무서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인터넷과 디지털리즘의 폭발은 종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으며, 새롭고 파격적인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진보주의자와 신세대들에게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터넷
필자는 MacWorld 컬럼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때에 따라 이 양극을 구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컬럼의 내용을 간단히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인 이언 브라운(Ian Brown)은 방송중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유리가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공중파를 통해 흘려 버렸다. 그러자 그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언 브라운이 방송을 끝낸 직후부터, 이언은 모르지만 유리를 알았던 사람들이 '우리 또한 유리와 친분이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E메일을 통해 보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현상은 유리라는 인물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유리를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리의 인터넷과 E-메일 주소를 컴퓨터에서 삭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리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 오며, 때때로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이언 브라운에게 가깝게 와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다.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모두 유령이나 신기루에 불과하며 삶과 죽음이 별다른 이유 없이 공존해 버린다는 것이다. 생전에 유리는 분명 존재했지만 E-메일을 통한 그의 존재는 느낄 수가 없었고, 그 반대로 그가 운명을 달리한 이후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우편 편지를 주고받는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첨단 테크놀러지인 E-메일을 통해 디지털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차이점만 존재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언 브라운은 이 사건을 통해 사이버 스페이스가 묘한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유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언 브라운은 그것을 느낄 수 없었으며, 어쩌면 유리는 죽은 이후에 더 큰 생명력을 가지고 이언 브라운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매혹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상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중독적이다. 차원이 다르다. 감각적이다. 건조하다. 파격적이다. 진보적이다. 지역적이다. 무의미하다. 쿨(Cool)하다. 즉 사이버 스페이스는 디지털리즘과 가상현실이라는 전제 하에 명확히 정의를 내리기에는 아직 실질인 '무엇'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10여년 전 전자계산기조차도 새로운 매개체로 받아들이던 보수 세력에게 컴퓨터라는 매개체는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정의조차 내리기 힘든 고차원적인 개념이었다. 마치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가 미래의 록큰롤을 연주하자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듯이, 포스트(post)의 개념은 동시시대적인 개념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물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는 공존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공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네와 르느와르가 생존하고 있을 때 인상주의는 엄격한 현실이며 동시대적 흐름이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를 언급하면 모네나 고갱이 상징적으로 떠오르지만, 동시대적 개념을 갖고 바라보면 백 투 더 퓨쳐라는 영화처럼 일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큐비즘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피카소가 떠오를 것이며, 초현실주의를 언급하면 살바도르 달리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시점에서 과감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인터넷은 매혹적인 디지털리즘이며,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상징물이다. 21세기 중반에 누군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묻는다면 분명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 그리고 넷스케이프의 마큰 앤드리센이 언급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징물로서 인터넷은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갖가지 형용사의 의미를 단 한번에 함축시킨다. 도스는 모더니즘의 개념이다. 절대적이며 기계적인 도구로써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계량시켜 준다는 비전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제공한다. 일단 한 번 길들여지고, 이 방식의 편리함을 제공해주면, 모더니즘은 급속도로 무너질 것이며, 포스트 모더니즘은 새로운 자리 매김을 시작할 것이다.
무너지는 모더니즘과 다가오지 않는 포스트 모더니즘
MIT의 사회학과 교수인 쉐리 터클(Sherry Turkle)은 'Life On the Screen'이라는 파격적인 책을 통해 기다리는 새로움을 도래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진부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논리를 보수와 진보, 즉 올드 에이지(The Old Age)와 뉴 에이지(The New Age)의 양극을 통해 펼쳐 보이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만약 필자가 현실을 떠나 가상현실에서만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변화하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으므로 뉴 에이지를 위한 진보적인 사고를 가져야만 한다.
무너지는 모더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과학이 인류와의 융합 과정에서 단순한 도구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도래할 포스트 모더니즘, 즉 디지털 세계에서는 단순 도구 차원을 넘어 삶의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상현실은 자기 방어 중심 체제이다. 집단의 공정성보다 개인의 효율성이 우선시 되며, 개인의 열등 의식, 즉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을 입어야 할까?'라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어떤 차를 타고 무엇을 먹어야 할까?' 따위의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숨기고 싶은 만큼 자신을 감출 수 있다. 즉 표현의 자유는 가공할 만큼 확장되었으며, 개인 프라이버시도 이에 못지 않게 굳건히 지켜질 수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또 다른 현실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산업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병폐를 소리없이 해결해 놓을 것이다.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동할 기회를 제한시켜야만 한다. 혹자는 버스 요금을 올린다든지 아니면 기름값과 자동차 세금을 올려, 유동 인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해결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밖으로 나갈 이유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이런 유토피아 개념을 가능하게 만들 유일한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인류의 삶을 더욱 매혹적이며 가치있는 터전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도스(DOS)를 보수적인 컴퓨터 사용자의 표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매킨토시와 윈도우로 대변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유저는 분명 진보적인 사용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출현으로 넷스케이프 상에서 웹 서핑을 하는 사용자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활기를 띈다면, 그래픽 인터페이스 유저는 보수라는 탐탁찮은 타이틀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보수의 표상인 도스 사용자는 이제 존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 시점에 다다를 것이다.
가상현실과 현실, 꿈과 현실의 모호성
변하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진보라는 가치 하에 '미래는 이런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그리고 변화의 모든 장점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이론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보수는 과거의 진보였으며, 과거의 보수는 존재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잊혀져 버렸다. 그렇듯 운명의 사이클은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프레임 속에서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VR은 Virtual Reality, 즉 가상현실의 영어 약어이다. 디지털 문화가 20세기가 낳은 최대의 혁명(혼돈)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가상현실, 즉 사이버 스페이스가 또다른 현실이냐?'라는 쟁점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디지털리즘을 받아들이는 모든 네티즌은 또 다른 현실에서 또 다른 자아를 갖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꿈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것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과 꿈이 서로 실질적인 연계성과 연속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이 무너지는 가상현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자. 시간이 꿈이나 현실에서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면, 프로이드가 말하는 꿈이나 옆집 순이가 당신에게 팔려는 꿈이나 똑같이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리즘이 구축해 놓은 사이버 스페이스는 엄연한 현실이며, 이것을 또 다른 현실, 즉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은 기존 현실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보다 풍부한 삶을 영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스페이스가 제2의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먼저 존재의 정통성이 부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당신이 진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당신은 분명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낸다'라면 존재의 실제를 알릴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 여부를 알리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실질적인 문제는 자신이 '진짜 자신'이냐는 것이고, 이것을 증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실제 현실에서 그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영원히 만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상대방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오묘한 이유는 존재가 단수의 개념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존재의 투명성
사이버 스페이스가 보편화되어지면, 인터렉티브라는 개념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상호 교환의 개념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인터렉티브'하다는 표현은 두 명 이상의 존재가 실제 현실인 제1의 현실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제2의 현실을 통해 사고를 공유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 스페이스가 독특한 문화를 내포한 거대한 공간으로 팽창하게 된다면 (10년 후의 인터넷을 상상해 보라!) 위헤서 필자가 언급했듯히 존재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거대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육체적인 만남이 필요 없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만남은 유일무이한 존재의 독립성조차 가상본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만약 당신의 5개의 E-메일 주소와 5개의 ID를 보유하고 있다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인터렉티브한 삶을 살 수 있다. 매킨토시 시스템의 멀티파인더와 윈도우의 멀티태스킹이 드디어 그 위력을 발휘해 사이버 스페이스의 존재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은 Look & Feel이라는 GUI의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는 신호탄이 아닐까?
그리고 당신은 상대방을 의심하며 이같은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당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실로 무서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인터넷과 디지털리즘의 폭발은 종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으며, 새롭고 파격적인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진보주의자와 신세대들에게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터넷
필자는 MacWorld 컬럼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때에 따라 이 양극을 구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컬럼의 내용을 간단히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인 이언 브라운(Ian Brown)은 방송중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유리가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공중파를 통해 흘려 버렸다. 그러자 그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언 브라운이 방송을 끝낸 직후부터, 이언은 모르지만 유리를 알았던 사람들이 '우리 또한 유리와 친분이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E메일을 통해 보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현상은 유리라는 인물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유리를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리의 인터넷과 E-메일 주소를 컴퓨터에서 삭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리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 오며, 때때로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이언 브라운에게 가깝게 와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다.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모두 유령이나 신기루에 불과하며 삶과 죽음이 별다른 이유 없이 공존해 버린다는 것이다. 생전에 유리는 분명 존재했지만 E-메일을 통한 그의 존재는 느낄 수가 없었고, 그 반대로 그가 운명을 달리한 이후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우편 편지를 주고받는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첨단 테크놀러지인 E-메일을 통해 디지털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차이점만 존재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언 브라운은 이 사건을 통해 사이버 스페이스가 묘한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유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언 브라운은 그것을 느낄 수 없었으며, 어쩌면 유리는 죽은 이후에 더 큰 생명력을 가지고 이언 브라운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매혹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상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중독적이다. 차원이 다르다. 감각적이다. 건조하다. 파격적이다. 진보적이다. 지역적이다. 무의미하다. 쿨(Cool)하다. 즉 사이버 스페이스는 디지털리즘과 가상현실이라는 전제 하에 명확히 정의를 내리기에는 아직 실질인 '무엇'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10여년 전 전자계산기조차도 새로운 매개체로 받아들이던 보수 세력에게 컴퓨터라는 매개체는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정의조차 내리기 힘든 고차원적인 개념이었다. 마치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가 미래의 록큰롤을 연주하자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듯이, 포스트(post)의 개념은 동시시대적인 개념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물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는 공존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공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네와 르느와르가 생존하고 있을 때 인상주의는 엄격한 현실이며 동시대적 흐름이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를 언급하면 모네나 고갱이 상징적으로 떠오르지만, 동시대적 개념을 갖고 바라보면 백 투 더 퓨쳐라는 영화처럼 일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큐비즘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피카소가 떠오를 것이며, 초현실주의를 언급하면 살바도르 달리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시점에서 과감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인터넷은 매혹적인 디지털리즘이며,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상징물이다. 21세기 중반에 누군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묻는다면 분명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 그리고 넷스케이프의 마큰 앤드리센이 언급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징물로서 인터넷은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갖가지 형용사의 의미를 단 한번에 함축시킨다. 도스는 모더니즘의 개념이다. 절대적이며 기계적인 도구로써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계량시켜 준다는 비전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제공한다. 일단 한 번 길들여지고, 이 방식의 편리함을 제공해주면, 모더니즘은 급속도로 무너질 것이며, 포스트 모더니즘은 새로운 자리 매김을 시작할 것이다.
무너지는 모더니즘과 다가오지 않는 포스트 모더니즘
MIT의 사회학과 교수인 쉐리 터클(Sherry Turkle)은 'Life On the Screen'이라는 파격적인 책을 통해 기다리는 새로움을 도래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진부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논리를 보수와 진보, 즉 올드 에이지(The Old Age)와 뉴 에이지(The New Age)의 양극을 통해 펼쳐 보이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만약 필자가 현실을 떠나 가상현실에서만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변화하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으므로 뉴 에이지를 위한 진보적인 사고를 가져야만 한다.
무너지는 모더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과학이 인류와의 융합 과정에서 단순한 도구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도래할 포스트 모더니즘, 즉 디지털 세계에서는 단순 도구 차원을 넘어 삶의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상현실은 자기 방어 중심 체제이다. 집단의 공정성보다 개인의 효율성이 우선시 되며, 개인의 열등 의식, 즉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을 입어야 할까?'라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어떤 차를 타고 무엇을 먹어야 할까?' 따위의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숨기고 싶은 만큼 자신을 감출 수 있다. 즉 표현의 자유는 가공할 만큼 확장되었으며, 개인 프라이버시도 이에 못지 않게 굳건히 지켜질 수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또 다른 현실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산업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병폐를 소리없이 해결해 놓을 것이다.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동할 기회를 제한시켜야만 한다. 혹자는 버스 요금을 올린다든지 아니면 기름값과 자동차 세금을 올려, 유동 인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해결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밖으로 나갈 이유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이런 유토피아 개념을 가능하게 만들 유일한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인류의 삶을 더욱 매혹적이며 가치있는 터전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1996.06. Digging in the Dirt, 디지털리즘과 가상현실의 매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