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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yrus/Digging in the Dirt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Episode 1 - 5

 하형일씨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는 과거 HOW PC에 연재되었던 것인데, HOW PC를 구독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연재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략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무렵이라고 추측하는데, 자바를 다루는 와중에 HOW PC가 폐간되어 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실리콘 밸리와 선구적인 미치광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가장 좋은 책은 스티븐 레비의 'The Hackers(국내 번역명 :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사민서각, 김동광 옮김)'이지만, 이 연재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재미있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Episode 1. 작은 위성 도시들의 살아있는 세포조직, "여기가 실리콘 밸리다"

스탠포드 대학이 위치한 팔로알토를 기점으로 왼쪽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연결되는 280번 고속도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오클랜드를 연결하는 880번 고속도로를 두고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분지가 바로 실리콘 밸리다. 디지털 문명의 메카로 불리는 이 실리콘 밸리의 역사는 불과 50년 남짓, 밸리의 심장부인 팔로알토의 에디슨 가에 위치한 휴렛과 팩커드의 차고에서부터, 세계 최대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업체인 산타클라라의 인텔사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분지는 실리콘 관련 산업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실리콘 밸리의 벤처리스트들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차원과 행동하는 양식을 바꿔놓았으며, 산업 혁명 이후 양적으로만 팽창하던 동력에 의한 가치 창조에서, 정적이며 비파괴적인 포스트-산업 혁명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켜 놓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룩한 실리콘 밸리의 진정한 가치는 결코 기존 디지털 산업의 빅 플레이어였던 IBM 사나 모토롤라사의 치밀한 계산적 사업 방식이나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 방침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실리콘 밸리의 성장과정은 소위 창고에서 이것저것 두드려 보다가 하나 둘씩 아이디어를 창출해낸 무자본 아마추어들의 장인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있다. 현재 미국의 반도체와 컴퓨터 관련산업은 전미 경제 성장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으며, 4천 5백억 달러에 달하는 실리콘 밸리의 경제 규모는 대다수 유렵 선진 국가들의 주식시장의 규모와 맞먹는 천문학적인 가치이다.

실리콘 밸리의 7천여 실리콘 관련 업체들은 현재 팔로알토, 쿠퍼티노, 서니베일, 마운틴 뷰, 사라토가, 로스 가토스, 산타클라라, 우드사이다, 멘로 파크 그리고 산호세 등의 이 이 지역 작은 위성 도시들을 경계로 즐비하게 포진해 있으며, 매주 10개 이상의 실리콘 관련 벤처그룹들이 이곳에서 새롭게 꿈을 열고 있다. 벤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정확히 30년 전이며, 실리콘 밸리의 창출에 핵심역할을 담당한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스핀오프를 출발지로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제2의 마크 안드레센과 제리 양을 꿈꾸는 20대 후반의 벤처리스트들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곳 밸리로 향하고 있다. 마치 무어의 법칙을 거시적 관점에서 증명이라도 하듯, 박테리아가 일정 기간을 주기로 생존의 터전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듯 이들 벤처기업들은 이 작은 밸리를 치밀한 실리콘 세포조직으로 팽창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공위성으로 이 벤처리스트들의 작은 세포 조직들을 내려다본다면, 이들은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거대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구성하는 작은 트랜지스터들로 무어의 법칙에 준하여 거시적으로 팽창해온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단면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들 벤처리스트들이 이룩한 기적은 미국 경제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80년대의 레이건 정부를 풍요의 시대로 일구는데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즈음 유행했던 여피족이라는 단어도 실리콘 밸리의 벤처리스트들과 무관하지 않다. 투자자들은 87년도의 주식시장 붕괴의 해법을 실리콘 밸리에서 찾아냈으며, 클린턴의 선거 전략이었던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It's economy, stupid!)"의 슬로건과 오늘날 다우존스 인덱스를 1만 포인트로 치닫게 한 힘의 원천도 하이 테크놀로지를 지향하는 이들 벤처리스트들에서 비롯되었다. 몇 년간 한 푼의 이윤도 창출하지 못한 풋내기 회사인 넷스케이프 사가 주식시장에서 자사의 주식을 상장하면서 제너럴다이나믹스 사가 40여 년간 구축해온 주식의 가치를 단 1분만에 경신한 것을 시작으로, 인터넷 상거래의 대표주자인 아마존과 이-베이(eBay)는 하루에 수십 달러씩 주가를 폭등시키면서 월스트리트의 진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다.

지금 실리콘 밸래의 산업규모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과 어깨를 견주며, 할리우드 영화산업과 비교하면 열 배가 넘는 초고속 상승곡선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속 성장의 뿌리가, 동부의 MIT대에 복귀하지 못한 스탠포드공대의 프레데릭 테르만이란 교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Episode 2.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 "프레데릭 테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리콘 밸리의 불씨를 만든 프레드 테르만(Fred Terman)에 대해 모른다. 조지 루카스의 불후의 명작 <스타워즈> 시리즈가 4편쯤에 이르러 우리에게 알려졌듯이, 실리콘 밸리의 이야기도 70년대의 애플사나 인텔사의 천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 신화의 진짜 뿌리는 훨씬 더 내려간다.

50년 전 동부의 아이비리그와 MIT대의 번영에 심한 콜플렉스를 앓고 있던 스탠포드 대학과 이곳 공대를 책임지고 있던 테르만 교수의 지극히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지금의 실리콘 제국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괴물이 탄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실리콘 밸리는 몇몇의 거부와 평범한 농부들이 일상을 일궈가는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일명 '환희의 밸리(The Valley of Heart's Delight)'로 불리던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한 살구나무와 호두나무로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 지대로 형성된 서부의 전형적인 전원도시였던 것이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산타크루즈 해변이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를 끼고 있는 이 '환희의 밸리'는 2, 30년대의 경제 대공항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대학인 스탠포드대와 갤리포니아대의 버클리 캠퍼스에서 배출된 대부분의 인재들은 학부를 졸업하고 동부의 대도시로 나가 그들의 꿈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동부의 대도시인 뉴욕, 시카고, 워싱턴, 보스턴 등에 비해 산업 기반이 현저하게 뒤쳐진 캘리포니아의 작은 전원도시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정착할리 만무했다.

이것이 스탠포드 공대의 학과장을 맡고 있던 테르만 교수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팔로알토 지역에 마땅히 취업할 기반이 없어 동부로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이를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게 된다. 30년대는 라디오 산업이 최첨단의 전자산업으로 각광 받던 시대였고, 테르만 교수는 자신의 전공과 일치하는 라디오 기술을 팔로알토 시를 중심으로 정착시키고, 나아가 제자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모종의 일을 꾸미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동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빌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고,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설립한 휴렛-팩커드 사의 성공은 초창기 실리콘 밸리의 형성 과정에 디딤돌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동시에 이들의 성공은 테르만 교수에게 팔로알토라는 작은 도시에 전자 산업이 형성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만나는 제자들마다 과수원 대신 하이-테크놀로지 사업에 뛰어들 것을 종용했다.

곧이어 터진 세계 제2차 대전은 미 연방정부에게 캘리포니아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태평양을 끼고 있는 실리콘 밸리는 방위산업체들의 번영에 따라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캘리포니아는 더 이상 과거의 캘리포니아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연방 정부는 캘리포니아의 3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러스, 샌디에고에 미국의 대표적인 방위산업체를 유치했고, 실리콘 밸리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록히드사의 설립은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중, 소규모의 전자업체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해 주었고, 간접적으로는 테르만 교수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나아가, 테르만 교수의 진가는 2차 대전을 전후로 팽창해 가는 팔로알토시의 테크놀로지 산업을 스탠포드대의 번영과 접목시키기 위해 창안한 독특한 프로젝트에서 또한번 발휘된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스탠포드 공대를 동부의 명문 MIT 공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동부에서 활약하던 팔로알트 지역 출신 인재들을 철새들처럼고향으로 복귀시키는 기현상까지 낳게 했다. 이쯤되면 테르만 교수가 주창한 프로젝트가 몹시 궁금해진다. 프로젝트의 내용인 즉, 팔로알토시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스탠포드대가 자교(自校)의 이익에 부합되며, 하이-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조직이라는 두 조건을 갖춘 기업들에게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영구 임대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휴렛팩커드, 이스트만코닥, 제너럴일렉트릭(GE), 쇼클리 반도체연구소 등이 그 때 기회를 잡은 주인공들이며, 이 프로젝트는 팔로알토 시에서 멘로파크까지 확대되면서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상징으로 떠오른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 파크(Stanford Industrial Park)로 성장시키게 된다.

특히 테르만 교수의 설득에 의해 스탠포드대의 교수로 복귀한 윌리엄 쇼클리와 그가 운영하던 쇼클리 트랜지스터 연구소는 훗날 수십 개의 반도체 기업으로 스핀오프를 시작하면서, 인텔이라는 작은 회사로 하여금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DRAM)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레드 테르만 교수의 작은 콤플렉스가 실리콘 밸리의 프라이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스탠포드대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는 미국 최고의 사립대학과 주립대학으로 우뚝 솟았으며, 현재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동부의 실리콘 밸리인 '루트 128' 지역은 실리콘 밸리의 발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프레드 테르만은 진정한 20세기의 엔지니어였다. 그가 만약 엔지니어의 순수한 목적 대신, 사업가적인 취지로 그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면 오늘날 실리콘 밸리가 지니고 있는 낭만과 로맨스는 상당부분 탈색되었을 것이며, 아마추어 벤처리스트들의 행진이 일찌감치 그 효력을 다해 버렸을 것이다. 그는 1982년 레이저 프린터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가 또 다시 실리콘 밸리를 팽창시킬 무렵 세상을 떠났다.


Episode 3. 떠오르는 모래성 "에디슨가의 가라지"

사람들은 종종 실리콘 밸리를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과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에 비교하곤 하는데, 이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신화는 모두 '가라지 문화(Garage Culture)'에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디트로이트에는 헨리 포드의 가라지가 있고, 할리우드에는 월트 디즈니의 가라지가 있으며, 실리콘 밸리에는 휴렛과 팩커드의 가라지가 있다. 가라지(Garage)란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의 일반 가정집 차고(車庫)를 뜻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만화 <스머프>까지 기상천외한 발명품들은 대개 아인스타인풍의 붉은 마파 머리와 허름한 복장을 한 과학자들이 목조 건물 가라지에서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발명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20세기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런 아마추어들의 목조 건물 가라지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팔로알토시의 에디슨 가에 위치한 빌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의 가라지는 공식적인 실리콘 밸리의 탄생을 알리는 이정표이며, 현재 그곳에는 실리콘 밸리의 1번지라는 공식적인 푯말이 박혀있다(애석하게도 스티브 잡스의 가라지에는 아무런 푯말이 없다). 빌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는 테르만 교수의 프로젝트에 의해 팔로알토 지역에서 전자산업을 추진한 첫 번째 기업이자 지금까지 맨손으로 시작한 실리콘 밸리의 벤처리스트 가운데 비즈니스의 규모나 실리콘 밸리 형성의 기여도 차원에서 단연 으뜸이다.

혹자는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나 인텔사가 실리콘 밸리의 형성과정에 더욱 기여했다고 주장하겠지만, 노이스와 무어의 인텔사는 벤처 캐피털이라는 자금의 지원으로 설립된 근대적인 기업이며, 무일푼으로 아이디어 하나로만 승부를 걸어 성공한 휴렛팩커드와 애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봐야한다. 휴렛과 팩커드의 이러한 모험정신은 훗날 실리콘 밸리를 찾아오는 수많은 아마추어 벤처리스트들에게 '실리콘 밸리 방식'이라는 기본 정신으로 승화된다. 그들은 무일푼으로 시작했기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었고, 또 기존에 개발된 상품을 저렴하게 만들어 시장을 형성하기보다 세상에 없는 상품들을 만들어 그들만의 시장을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아마추어 벤처리스트들의 행진이야말로 실리콘 밸리의 가장 큰 매력이며,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메카로 떠오른 실리콘 밸리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레드 테르만 교수의 연락을 받은 휴렛과 팩커드는 1938년 그들의 고향인 팔로알토시의 367 에디슨 가에 위치한 허름한 목조 가라지에서 동전을 던져 누구의 이름을 회사 이름에 먼저 올릴지를 결정하게 된다. 뉴욕시의 제너럴일렉트릭(GE)사에서 매월 120달러를 받으면서 메니저 트레이닝 연수를 받고 있던 데이빗 팩커드에게는 고향으로의 복귀가 쉽지않은 결정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휴렛과 팩커드는 자본금 500달러를 출발한 그들의 가라지에서 모델명 HP220A라는 오디오 발진기를 첫 상품으로 내놓았고, 그 해에 제작한 오디오 발진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HP220B 8대를 월트 디즈니 사에서 제작하는 <판타지아(Fantasia)> 영화 제작의 필수 장비로 판매되는 행운을 잡으면서 창립 1년만에 안정적인 기업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HP사는 뛰어난 성능과 우수한 품질의 전자관련 기기들을 시장에 선보이면서 전자기기 관련 시장의 빅 플레이어로 성장하게 되었고, 때마침 터진 제2차 세계 대전은 HP사가 한 걸음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휴렛은 당시 몸소 육군 장교로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전쟁기간 동안 HP사는 레이더 관련 마이크로 웨이브 신호 발진기를 제작하면서 사세(社勢)를 확장시켜 나갔고, 팔로알토 지역에 새 본사를 구축하게 된다. 일명 '레드우드 빌딩'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사무실, 연구소, 그리고 공장을 겸비한 다목적 건물구조 형태를 띄고 있는데 휴렛과 팩커드는 만에 하나 그들의 사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슈퍼마켓으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했다고 한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지난 1947년, 주식시장에 상장하게 된 HP는 한국전쟁을 통해 다시 한번 사세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잡았고, 마침내 미국 500대 기업을 향한 힘찬 행진을 지속하게 된다. 특히 미니 컴퓨터와 워크스테이션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데스크톱 전자 계산기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면서 명실공히 실리콘 밸리를 대표하는 하이-테크놀로지 기업으로 변신한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에는 미니 컴퓨터, 손에 쥘 수 있는 전자 계산기, 퍼스널 컴퓨터 그리고 HP사를 일반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는 레이저 프린터인 레이저 젯을 시장에 선보이면서 연평균 4백억 달러의 매출액과 십만명이 넘는 사워을 거느리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HP사의 성공은 오늘날 가라지에서 독수공방하는 전 세계의 젊은 벤처리스트들에게 희망의 찬가를 제공할 뿐 아니라, 휴렛과 팩커드가 추구한 일명 'HP 경영방식(HP Way)'은 훗날 모든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경영전략을 설정하고 조직을 구성하는데 필수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휴렛과 팩커드는 당시의 기업 문화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HP사를 운영해 나갔다. 미스터와 미시즈의 격식을 무너뜨렸고, 바로 이름을 부르는 진보적인 기업문화를 60년대부터 형성해 나갔으며, 불필요한 결재라인의 파괴는 물론, 사무실의 칸막이를 모두 없내는 소위 오픈 도어 정책을 펼쳐나갔다.

또 미국 기업 최초로 융통성 있는 근무 시간제(Flex Time Work Schedule)를 실시했고, 나아가 복지를 강조하는 기업으로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휴렛과 팩커드의 이렇듯 진보적인 경영전력은 7, 80년대 말의 오일 쇼크, '메이드 인 저팬'의 침략, 그리고 주식시장 붕괴 이후 수년간 지속된 불황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빌 휴렛은 현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팔로알토에서 사회복지 관련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고 있으며, 데이빗 팩커드는 테르만 교수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가라지에서 시작된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몸소 눈으로 확인하며, 1996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Episode 4.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 메인 프레임과의 먼 이별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은 실리콘 밸리의 어떤 스토리보다 흥미진진하다.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진화과정은 이 다큐멘터리 제3부쯤에 나올 '프로세서, 프로세싱, 그리고 프로그레스, 섹션에서 심도 깊게 다루겠고, 여기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과정과 실리콘 밸리의 형성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소수 정예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려고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 탄생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은 1947년 뉴저지의 벨연구소에서 일명 '인벤션팀(Invention Team)'으로 불리는 트랜지스터 3인방, 즉 존 바르딘, 월터 브라튼, 그리고 윌리엄 쇼클리에 의해 발명된 트랜지스터의 출현이며, 이들은 거대한 메인프레임의 진공관을 대체시킬 신소재 장치의 기본 메커니즘을 개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트랜지스터 3인방의 팀장이었던 윌리엄 쇼클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실리콘 밸리의 팔로알토에서 보냈고, 그 당시 대부분의 인재들이 그랬듯이 청운의 꿈을 안고 동부의 명문인 MIT로 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벨연구소의 책임 연구원으로 있던 머빈 켈리에 의해 스카우트되어 벨 연구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머빈 켈리는 쇼클리에게 그보다 20년 먼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C.J. 데이비슨(C.J. Davisson)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하지만, 그는 머빈 켈리의 진공관 연구소로 방향을 바꿔 '인벤션 팀' 3인방의 일원으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게 된다. 물론 쇼클리의 트랜지스터 개념이 처음부터 거대한 진공관을 사용하는 집채만한 대형 컴퓨터를 책상 위의 소형 퍼스널 컴퓨터로 바꾸어놓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새로운 쇼클리의 패러다임은 마치 요리가 서너 시간과 엄청난 양의 음식재료를 투자해 고작 서너 명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등의 비효율성에서 팔피한 개념으로, 값싸게 복제될 수 있는 비콤C 한 알로 모든 영양소를 대치하며, 기존의 먹거리가 제공하는 포만감을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는 마술적인 메타포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트랜지스터를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둔갑시키려면 각각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접합기술이 필요했는데, 쇼클리는 이러한 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향한 마지막 단계에서 조직, 인력, 자본의 3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내분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도중하차하게 된다. 1940년대 말 벨 연구소에서 윌리엄 쇼클리를 주축으로 하여 개발된 트랜지스터는 인텔사의 창립자인 밥 노이스에 의해 개발된 집적 회로, 즉 IC(Integrated Circuit)의 탄생 이전까지는 상업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무한한 가능성만을 지닌 꿈의 소재로만 알려져 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 연방 정부와 동부의 엘리트 엔지니어들은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닐 수 있는 신무기의 개발이나 이 무기들을 보다 멀리 발사할 수 있는 로케트 기술에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었던 터라, 쇼클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들의 관심 테마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에 쇼클리는 프레드 테르만 교수의 종용에 의해 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씨앗을 가지고 고향인 팔로알토로 돌아오게 되고, 여기서부터 실리콘 밸리는 무한한 번영을 보장하는 약속의 땅으로 변모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쇼클리의 트랜지스터 개념이 당시 대형 컴퓨터와 메인 프레임 업체였던 IBM사에게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는 사실이다.

무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대량 생산에 의한 점진적 이윤의 창출이란 실리콘의 개념을 그 당시 메인 프레임 사업을 독접하고 있던 IBM사는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들의 독과점 아성을 붕괴시킬 수 있는 이 새로운 개념에 그들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물론 컴퓨터라는 기기 자체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시대의 가치관도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트랜지스터의 개념을 소홀히 하게끔 한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한 대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가 창출해내는 부가가치가 오늘날의 퍼스널 컴퓨터 관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컴퓨터를 만들게 된 궁극적인 계기도 록히드사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집을 팔아 그에게 컴퓨터를 사줄 확률보다는 그가 스스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컴퓨터를 소유하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쇼클리는 팔로알토로 복귀하자마자 테르만 교수의 프로젝트였던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 파크의 한 모퉁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쇼클리 트랜지스터 연구소 (Shockley Transistor Laboratory)를 설립했고, 자신의 연구소에서 개발하게 될 포 레이어 다이오드(Shockley Four Layer Diode)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될 소수 정예의 엔지니어들을 동부에서 스카우트해 오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실리콘 밸리의 첫 번째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그 유명한 '8인의 배신자들'이다.

즉, 밥 노이스, 고든 무어, 유진 클라이너, 빅터 그리니치, 쥴리우스 블랑크, 진 호어니, 제이 라스트가 그들로 이들은 쇼클리를 배신하고, 그들만의 독집 조직인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8인의 배신자들'은 '환희의 밸리'에서 실리콘 밸리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함과 동시에 메인프레임과의 먼 이별을 알렸다.


Episode 5. 쇼클리와의 결별 "오 마이 페어차일드!"

윌리엄 쇼클리는 타고난 재주꾼이었다. 그는 당대를 주름잡았던 천재적인 물리학자였으며, 추상적인 이론을 도출해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는 체계적인 모델을 창출해낼 수 있는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또 여가 시간에는 수준급의 마술을 선보이곤 하는 아마추어 마술사였으며, 70년대에는 '천재들을 위한 정자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돈 키호테적인 끼가 철철 넘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직을 이끌만한 리더는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쇼클리는 그가 동부에서 스카우트해온 실력 있는 인재들과 더불어 '20세기의 다이너마이트'로 불리는 트랜지스터의 상용화 기술에 박차를 가하게 되지만, 그의 융통성 없는 성격과 공격적인 통솔력은 쇼클리 트랜지스터 연구소의 효율성을 추락시키는 동시에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를 중심으로 한 '8인의 배신자들'에게 쿠데타의 명분을 주게 된다. 윗 사람에게 신의를 잃으면 올라갈 자리가 없고, 아래 사람에게 신의를 잃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옛말처럼, 쇼클리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대한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가 손수 스카우트했던 '8인의 배신자들'에게 실리콘 밸리의 미래를 내어주고, 트랜지스터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8인의 배신자들'은 쇼클리와의 결빌 직후, 세계 최초로 실리콘 소재만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회사는 훗날 인텔, 내셔날 반도체, AMD 등 수십 개의 실리콘 관련 회사들로 '스핀오프(spin off)시키게 될 전설적인 페어차일드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페어차일드사는 태생부터 이미 개국 공신들인 8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공중 분해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 쇼클리의 연구소를 탈퇴한 8인의 배신자들은 트랜지스터라는 아이디어 상품에 대한 기술 외에는 실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고, 그들이 추구하는 집적 회로와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일반 가라지에서 어영부영 만들 수 있는 상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이 필요했다. 그것도 수백만 불의 대형 자본이 필요했지만, 그들의 뜬구름 같은 아이디어를 담보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줄 금융산업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밥 노이스라는 인물이 실질적으로 실리콘 밸리를 이끄는 차세대 주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고든 무어와 뒤늦게 인텔사를 통해 합류하게 될 앤디 그루브와 함께 이 사건 이후 실리콘 밸리를 디지털 문명의 메카로 승화시키게 될 두 번째 쿠데타인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의 주역이 된다. 쇼클리와의 결별과 첫 번째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데, 밥 노이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8인의 배신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기업 경영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그의 탁월한 사업수완은 앞으로 30년간 치열하게 전개될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에 모든 전략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노이스는 이 뜬구름 같은 트랜지스터 아이디어를 담보로 아서 록(Author Rock)이라는 금융 브로커를 통해 뉴욕의 거부였던 셔먼 페어차일드로부터 백 오십만 불이라는 자금을 무담보로 지원 받게 된다. 당시 계약조건은 만약 회사가 성공을 거두게 되면 뉴욕의 셔먼 페어차일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이고, 실패하면 어떠한 채무 부담도 지지 않고 깨끗이 물러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아서 록은 이 과정을 통해 번처 캐피털이라는 새로운 금융상품을 세상에 선보이게 되는데, 밥 노이스와 아서 록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이 새로운 투자 방식은 훗날 실리콘 밸리가 성장하면서 맨손의 벤처리스트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게 될 자금조달 방식으로 정착된다. 8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설립된 페어차일드사는 쇼클리 트랜지스터 연구소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도 안되는 마운틴 뷰의 찰스톤가에 소재한 초라한 2층 건물에 둥지를 틀고, 트랜지스터 제작을 박차를 가했다. 때마침 일어난 라디오 시장의 붐은 기존의 진공관을 사용한 고가의 라디오 시장에서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저가의 보급형 라디오로 시장의 흐름이 전화되는 과정에 있었고, 페어차일드사는 이 기회를 잡아 트랜지스터 분야에 선두주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페어차일드사의 도약에 결정적으로 불을 지핀 사건은 1957년 구 소련 연방이 쏘아올린 스푸트니크 1호(Sputnik)에 의해 형성된 미소(美蘇)의 스페이스 경쟁으로,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은 로켓과 인공위성을 유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컴퓨터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페어차일드를 비롯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집채만한 에니악 컴퓨터를 책상 위로 올려놓을 수 있는 묘안을 짜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