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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and Muse

크르노 크루세이드,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할 때, 이 작품을 순차적인 순서로 쓴 것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이 작품의 가장 마지막 장이 가장 처음에 쓰여졌을 정도라고 하는데, 크르노 크루세이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로제트와 크르노가 재회를 기뻐하며 포옹하는 장면, 아마 작가는 이 장면을 떠올린 뒤에 나머지 이야기의 살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크르노 크루세이드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엑소시즘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크르노 크루세이드는 근본적으로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봉인의 시계와 계약에 관한 것을 짚어보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조금 그 의미가 다른데, 이 작품의 다른 소재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둘은 작품과 깊게 연관된 것들이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크르노가 막달라와의 계약 그 이전에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죄인 모두가 뿔을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쉐다가 그 시계를 모두에게 주었다면, 막달라가 크르노와 계약을 할 때 막달라가 한 것은 수명을 지불한 것 외에는 없게 된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쉐다는 계약 이전에 크르노에게 그 장치를 주지 않았으며, 아이온이 재차 막달라를 살해하러 갔을 때 쉐다가 크르노에게 시계를 걸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막달라는 크르노가 아이온을 제지하다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시계와 상관없이 어떤 계약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로제트를 도와준 봉인의 시계 안의 막달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쉐다가 준 시계는 뿔이 없어도 영소를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므로, 막달라의 영소가 어떤 식으로든 크르노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애초 설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직접적인 해석을 보여주는데, 애니메이션이 애초 원작이 가지고 있던 주제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설정을 원작만으로 한정 짓는다면, 이 정도가 최선이라 생각된다.

막달라가 크르노와 맺었던 계약이란 것은, 막달라의 '능력'에 의해서 크르노의 잃었던 뿔의 능력을 대신해주겠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대신 희생해야만 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크르노가 계약이란 뭐지?라고 막달라에게 묻는데, 만화에서는 더이상의 설명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나온대로 속 편하게 생각해도 될 문제이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어떤 설정을 따라가더라도 다른 것을 깔끔하게 해석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쪽보다는 원작 만화 쪽이 훨씬 더 짜임새가 있다는 편에서, 만화쪽의 설정만으로 생각해 본다면, 시계와는 별도로, 수명을 담보로 한 계약이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막달라가 말했던, '내 목숨을 빼앗을 사람, 그 진짜 의미는..'이란 말과 다른 부분들도 훨씬 이야기가 된다. 즉, 크르노를 사랑하게 된 이상 크르노가 그대로 죽어가게 할 수 없었고, 크르노를 살리기 위해서 그녀의 수명을 매개로 하여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상대방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상대를 두고 갈 수 없기에 더 이상 죽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후반에 나오는, 막달라가 마지막 순간에 슬픈 표정으로 크르노에게 '다음 번에는 포기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부분도, 결국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면, 무리는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해석인 것 같다.

막달라와 크르노는 운명에 의해서 이끌려오게 되어서 굳이 시계같은 설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큰 무리가 없는 반면, 로제트가 크르노에게 다가온 것은 그런 운명을 통한 만남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시계의 설정은 훨씬 이야기를 매끄럽게 만들어준다. 이런 설정이 아니라면, 크르노 크루세이드는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계와 계약이란 것이 없는 로제트와 크르노를 생각해보라. 밝고, 생각보다 먼저 행동하는 한 소녀와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라면 소재마저 흔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기에, 시계와 계약은 이 이야기를 독특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로제트와 막달라는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렇기에, 막달라와 로제트를 겹치는데 필요한 나머지 하나, 시계를 통한 수명의 지불이라는 설정이 필요했던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아픈 과거로 얼룩져 있는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크르노는 왜 로제트와 계약을 했을까?

크르노도 말했듯이, 크르노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로제트는 분명히 요슈아를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로제트가 요슈아를 찾기 위한 여정에는 자신의 과거 동지들, 즉, 죄인들도 연관되어 있다. 크르노 자신도 언젠가는 그들과 다시 만나서 결말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게 아닐지 모르겠다. 또, 그렇기에 로제트 혼자서는 힘든 길이다. 막달라를 잃고 빛을 잃은 크르노에게 조금씩 다시 그 빛을 열어준 그녀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로제트가 후에 요슈아, 크르노 셋이 함께 하자는 말이 크르노의 마음을 움직여 로제트와 계약을 한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크르노가 로제트와 계약을 할 때, 크르노는 로제트에게 느꼈던 감정이 막달라에게 느꼈던 그런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로제트가 크르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을 때, 지금도 그 방법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서, 이 계약으로 로제트를 상처입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침묵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곧이어 로제트에게 잠령의 한계 상황이 오고, 로제트는 그 순간에 크르노에게 '좋았던 기억까지 부정하지는마'라고 말하고 쓰러지는데, 이때 크르노는 침묵에서 깨어나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한다. 그러면서 '항상 이러니까 내가 도와줄 수 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크르노가 로제트와 계약을 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아마 이 시점이 로제트에게 막연하게 느끼던 감정을 확인한 시점이 아닐까?


막달라와 크로노 사이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이 있는데, 크르노가 '나는 아이온의 검이다. 검은 명령에 따라야한다'라고 말했을 때 막달라가 '그럼 당신은 나를 죽일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그것이다. 막달라의 꿈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크르노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르노를 따라온 것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도 알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크르노가 정말 검으로서 망설임 없이 명령을 따를 사람이라고 느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로, 도저히 자기를 죽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닐까? 또, 자기를 데려온 이후, 죄인들 사이에서 줄곧 그녀를 배려해주는 모습에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당신은 나를 죽일건가요?'라는 말은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닐지 모르겠다. 남자의 마음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여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자신을 죽일 줄로만 알았던 크르노가 결국 아이온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 결과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크르노가 막달라에게 했던 말, '너의 목숨을 뺏기 전에 나 역시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라는 말, 이 말은 막달라가 처음에 했던 질문, '당신은 나를 죽일건가요?', 즉,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라는 말에 대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대답이다.


막달라와 로제트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두 사람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로제트가 한계상황에서 크르노에게 했던 말, '좋았던 기억까지 부정하지는마..'라는 말, 과연 무슨 의미일까? 좋았던 기억이란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크르노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만, 막달라의 시신 옆에서 항상 슬픈 모습으로 있던 그를 다시 웃게 만들어 준 것은 누구인가? 크르노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누구인가? 로제트가 아즈에게 했던,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라는 말, 눈물이 모두 나오게되면 웃게 될거라는 말은 아즈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크르노도 막달라를 잃고 더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슬퍼했다. 그렇기에, 로제트는 막달라처럼 단번에 크르노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어느틈엔가 서서히 크르노의 마음 속을 파고 든 것이다.

로제트는, 막달라처럼 크르노의 마음을 꿰뚫어 볼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제트는 아마, 자신도 그때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했는지 몰랐겠지만, '좋았던 기억을 부정하지마..'라는 말은, '막달라를 잃은 슬픔 뒤에,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웃음을 찾게된 것,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마저 부정하지는 마..'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아무 감정도 없는 상대방에게 다만 도움을 주려고만 했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막달라의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막달라처럼 쉽게 크르노의 마음을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로제트 역시 어렴풋이 크르노의 감정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크르노에게 그 '무엇'은 로제트였고, 크르노의 '항상 이러니까 내가 도와줄 수 밖에 없잖아..'라는 말은 '그래, 맞아.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해준 것은 로제트 너야'라는 말이겠지만, 두사람 모두 수줍음으로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크르노가 의식의 침묵에서 돌아온 후에, 로제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시계의 봉인을 풀어서 크르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이었는데, 막달라가 크르노와 계약을 하게 된 동기를 생각해보면 비슷해보이는건 우연일까? 그리고 둘의 행동, '당신은 나를 죽일건가요?'라는 말과, '좋았던 기억까지 부정하지는마..'라는 말..




이 행동과 말들은, 생각하거나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달려가는 로제트와, 조용하게 운명에 맞서는 막달라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두 사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로제트의, '둘이서 함께 나누자,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막달라의 몫까지..'라는 말도 흥미 있는 말이다. 막달라는 어떤 의미로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났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막달라의 몫까지 함께 나누자는 말은 두 사람에게 조금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로제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크르노를 기다려줬고, 크르노 역시 판데모니엄의 중추에서 로제트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 장면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은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 하지만, 끝이 있다면 새로운 시작도 있다. 크르노 크루세이드, 이 이야기는 1932년 로제트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그녀의 죽음이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로제트와 크르노 두 사람의 아름다운 재회장면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Written by Celdee, 2006.7.22, from Animate, Hitel